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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호갱’과 ‘왕’ 사이

문수정 산업부 차장


“장사를 하다 보면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보통 ‘사람’이에요.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거든요. 잠깐 스쳐 지나는 인연이라 생각하면서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지만,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어요. 내가 파는 음식의 가격표가 나란 사람의 값으로 매겨지는 것 같아서요. 나를 몇천원짜리 물건 정도로 대하는 사람들이 꼭 있거든요.”

취재 중 만난 한 음식점 사장님의 이야기다. 장사를 하다 보면 좋은 손님 덕에 웃는 날도 있지만 한없이 무례하고 불쾌한 사람들도 적잖이 겪는다고 했다. 힘이 나게 하는 이도 손님이고,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자도 손님이다. 그는 “고작 몇 푼짜리 음식 팔면서 어디 사장이라고 유세냐는 말을 들었을 때, 몇십만원짜리를 팔았다면 그런 소린 안 들었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사장님은 배달 시장이 커지면서 도가 지나친 손님도 많아졌다고 했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이야기를 리뷰로 쓴다거나, 얼굴 보고는 하기 힘든 말을 전화로 퍼붓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눈앞에서도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죠. 많아요. 그래도 대부분은 어느 정도 선을 지켜요. 경찰에 신고하는 상황으로 번질 수 있고, 보는 눈도 많고 하니까요. 그런데 비대면으로는 막나가는 사람들이 꼭 있어요.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해도 표정이나 몸짓을 못 보니까 ‘말로만 죄송하다면 그만이냐’ ‘목소리가 기분 나쁘다’ 이러는 거죠.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요.”

현대의 세계지도에서 사실상 왕의 지배를 받는 나라는 거의 사라졌거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손님은 왕이다’라는 관념은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숱한 갑질 논란으로 이 문구는 서비스 산업에서 사실상 퇴출됐으나, 그 자리에 ‘고객을 가족처럼’ ‘고객 중심으로’ 같은 수사가 들어왔다.

‘고객 중심’이라는 문구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손님에게 가장 좋은 서비스와 물건을 제공한다는 게 먼저 떠오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테다. 부당하게 불편을 끼치지 않는다, 손님의 입장을 살핀다, 정보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손님에게 정직과 성실을 다한다 등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된다. 몸과 마음을 다할 필요는 없다. 손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무릎 꿇어 서비스를 제공한다거나, 모욕을 감내해야 할 것까지는 없는 거다. 손님은 손님일 뿐 왕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니까.

하지만 ‘고객 중심’이라는 관점은 자칫 일방적일 수 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근로자나 유통 과정에 얽혀 있는 여러 관계자의 입장이 고객 중심이라는 가치에 밀려 피해를 입기도 한다. 얼마 전 ‘새우튀김 환불 요구’로 세상을 떠난 분식집 사장님의 사례도 쿠팡이츠의 ‘고객 중심 가치’가 왜곡되면서 벌어진 비극이었다. 고객 만족만 챙기다 보면 주문부터 배달까지의 과정에 배치돼 있는 누군가가 무시되거나 배제될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물론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고객님’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호갱’이 되는 경우 또한 허다하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호갱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입소문을 살피고, 후기를 점검한다. 접근할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있으니 서로 돕는 거다. ‘소비자’라는 단어가 들어간 단체, 온라인 커뮤니티가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누구나 호갱은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왕이 될 일도 아니다. 합리적이고 스마트한 소비자의 자리는 ‘호갱과 왕 사이’ 어느 즈음에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모 아니면 도일 필요는 없는 거니까.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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