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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축구하는 여자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한국 여자축구가 강팀이 된 듯해요.” 올해 설의 일이다. 대통령은 연휴 첫날 각계에서 선정된 시민 여덟 명과 영상통화를 했다. 영국에서 활약 중인 한국 여자축구의 간판 ‘지메시’ 지소연은 그중 첫 순서였다. 공개된 통화 내용은 길지 않았다. 대통령은 사상 첫 올림픽 본선 진출 기회를 눈앞에 둔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을 응원한다고 했다.

두 달 뒤인 지난 4월 최종 플레이오프에서 대표팀은 잘 싸웠다. 한때 세계 최강이던 중국을 끈질기게 위협했다. 마지막 경기, 단 한 골만 더 넣었어도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연장까지 이어진 경기가 끝나자 지친 선수들은 중국 쑤저우 경기장 잔디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적진에서 자국 팀을 향해 쏟아지는 중국 팬들의 환호를 들으며, 지소연은 분한 표정으로 트레이드마크인 자신의 파란 머리띠를 벗었다.

경기 뒤 언론이 대표팀에 찬사를 쏟아냈지만 그중 ‘미래가 밝다’는 표현은 의아했다. 여자축구 현실에 관심이 조금이나마 있는 이라면 그런 문장을 차마 쓰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분투는 현실이 그렇지 못하기에 나온 것에 가까웠다.

대표팀은 2010년 17세 이하,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각각 우승, 3위의 성적을 거뒀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정부는 이례적으로 대대적인 지원책을 내놨다. 3년 동안 지원금 185억원을 풀어 초·중·고 및 대학 여자축구팀 창설을 지원한다는 게 골자였다. 대한축구협회 등록 초·중·고 및 대학 여자축구팀 수는 지원이 끝난 2013년 전체 70개 팀으로 늘어난 걸 반환점 삼아 올해 54개 팀으로 줄었다. 정부 대책 발표 전 57개였던 것보다 외려 3개가 적다.

여자축구 간판 선수가 대통령과 새해 영상통화까지 했지만, 정작 그를 길러낸 국내 저변은 그 대통령의 임기 동안 더 움츠러들었다. 초·중 선수 합숙이 금지되면서 여자아이가 축구를 하는 건 가족이 여자축구부가 있는 학교 인근으로 이사하지 않고선 불가능해졌다. 운동부 선수가 대회에 나가 수업에 결석할 때 출석으로 인정해주는 ‘수업인정일수’도 축소됐다. 둘 모두 여자축구처럼 저변이 좁고 선수단 규모가 큰 단체종목에는 치명적이다.

당시 2개 팀이 늘었던 여자축구 실업리그 WK리그는 간신히 8개 팀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017년에는 인천 현대제철과 함께 리그 양대 명문으로 꼽혀온 초대 우승팀 이천 대교가 해체됐다. 연맹 직원 수는 3명으로, 남자프로축구 K리그를 운영하는 한국프로축구연맹의 10분의 1 수준이다. 올해는 한화생명이 리그 스폰서를 맡았지만 지난 시즌에는 그조차 구하지 못했다.

중국 일본 호주 북한 등 여자축구 강팀들이 수두룩한 아시아 무대에서 대표팀의 올림픽 진출은 어쩌면 월드컵 16강보다도 어려운 과제다. 이번 올림픽은 개최국인 일본의 본선 자동 진출 덕에 자리가 하나 늘었다. 다시 찾기 어려운 기회였다는 이야기다.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야 후배들의 앞길을 넓혀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대표팀 ‘언니’들은 마지막 휘슬이 울리는 순간까지 몸을 던졌다.

물론 단순히 몇 년간 돈을 쏟아붓는다 해서, 대표팀 지원을 늘린다고 해서 없던 저변이 한번에 늘어날 리 없다. 그렇다 해서 현 정부가 해온 대로 엘리트 체육의 유산을 부정하는 것만으로 이뤄질 일도 아니다. 보다 중요한 건 성별과 관계없이 가능한 한 많은 이가 마음 놓고 축구를 즐길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대통령의 말대로 한국 여자축구가 강팀이 되도록 도우려면 지금보다는 섬세한 고민이 필요하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라는 이름의, 각계 여성 유명인들이 모여 축구를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요즘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남성들이 전유하던 생활체육으로서의 축구가 비로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쁘고 기념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여자도 축구하러 간다’는 프로그램의 구호와 달리 이미 스스로의 모든 것을 걸고 축구를 해온 여성들이 있다. 보다 많은 여자들이 축구를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생각해야 한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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