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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영웅을 찾으십니까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야권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검증대에 오르자마자 패착을 연발하고 있다. 곳곳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린다.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사람들로서는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희망을 찾아 대거 이동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권의 대통령 후보들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누가 보더라도 국민 눈높이에 한참 못 미친다. 인물이 이리도 없을까.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할 영웅은 진정 없단 말인가.

토머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으로 유명하다. 그는 J S 밀과 더불어 19세기 영국의 대표 지성으로 불린다. 칼라일은 영웅의 요건으로 성실성과 통찰력을 꼽았다. 그는 인류가 향유하는 모든 것은 영웅의 산물이라고 썼다. 영웅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갯불이라면 나머지 사람은 장작더미와 같다. 영웅이 내려오면 그들은 모두 화염으로 타오른다. 대중은 영웅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시대의 대세로 떠오르던 상황에서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은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면 나라 형편이 확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영웅을 기다리고 찾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영웅은 드물다. 위대한 인물이라는 사람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징 조작과 진실 은폐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숨김이 불가능하다. 사방이 훤히 열려 있는데 어떻게 영웅 놀음이 가능하겠는가. 영웅숭배론에 빠지면 웬만한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진이 자랄 여지가 없다. 인기투표나 다름없는 여론 조사가 그런 세태를 더욱 부채질한다. 멀쩡하던 정치권 밖의 인사들까지 마음이 흔들리게 만든다. ‘정치적 사행 심리’를 조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한계를 직시한 터전 위에서 태동한 정치제도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권력을 잡으면 타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민주국가는 권력을 분립하고, 임기를 제한하며, 법이라는 제도적 올가미를 촘촘하게 만든다. 영웅숭배자들은 이런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간과하기 쉽다. 특별한 사람의 예외적 선의를 좇다 보면 민주주의 자체가 거추장스럽다.

결정적인 문제는 영웅을 갈망하는 사회에서 ‘자유에서의 도피’가 횡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토크빌은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지도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 그늘에 안주하면 ‘가축’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영웅 대망론(待望論)이 자칫 민주 독재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하자면서 불세출의 위인을 고대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요 자기모순이다.

민주주의가 잘 되려면 국민이 영웅이 돼야 한다. 이 시점에서 칼라일의 ‘영웅숭배론’을 다시 읽는 이유다. 칼라일은 “영웅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영웅에 적합한 세상 또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웅을 알아보려면 대중 역시 성실성과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영웅들로 가득 찬 세계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영웅숭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민주주의가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민주주의자로 가득 차야 한다. 민주주의자란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타인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접할 수 있어야 한다. 나랏일에 적극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되 나의 이익만 앞세우지 않아야 한다. 한마디로 ‘자유와 책임감 사이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왜 한국 정치가 갈수록 팍팍하고 저열해지는 것일까. 한국 정치가 ‘흠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ies)’로 퇴보한다고 정치인 탓만 해서는 안 된다. 그들도 국민 중에서 뽑힌 사람들이다. 그들이 잘못하게 내버려 둔 책임 역시 국민에게 있다. 국민의 수준이 민주주의의 수준을 좌우하는 것이다. 민주국가에서는 당연히 국민이 주인이다. 그 주인 노릇 하기가 쉽지 않다. 편벽된 논리에 마음을 주고,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며, 배를 띄웠다가 금세 뒤집어 버리는 국민이라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자. 내년 선거에서 누가 대통령이 돼야 하는지 개인적 호불호와 사적 이해관계, 특히 진영 논리를 떠나 국가 전체의 관점에서 두루 살펴보도록 하자.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후보들도 무슨 말을 하는지 한 번 경청해보자. 국민 스스로 영웅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성숙한 국민이 성숙한 민주주의를 만든다.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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