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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밥상+머리] 11시39분의 요리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버스는 30분마다 있었다. 나는 막 기차에서 내려 기차역 맞은편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잔 눈발이 날렸다 멈췄다 했다. 먼 과거의 시간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느라 이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낡은 버스들이 눈앞에서 오고 갔다. 나는 낮 12시30분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샀다. 아침을 먹지 않고 출발한 탓에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배가 고파졌다. 허름한 식당 하나가 터미널 건물 1층에 있는 것을 보았으나 식당에 들어가는 대신 동전을 넣고 숫자 1, 2, 3 중 하나를 누르면 번호에 해당하는 음료수가 나오는 대합실 구식 자동판매기에서 생수와 환타 하나를 샀다.

터미널 건물 외벽에 시계가 하나 걸려 있었다. 11시3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아주 먼 옛날의 11시39분 같았다. 아니면 먼 미래의 11시39분이거나. 문득 시계 아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어졌다. 한 대, 두 대, 세 대…, 종내 오늘 막차를 놓치더라도 이곳에 서 있으면 기다리는 사람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약속한 이도 없었다. 다만 이 시계 아래에서는 다른 시간이 흐를 것만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짐을 든 노인들이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휴가 나온 군인과 젊은이들은 빠르게 지나쳐갔다. 그때마다 비둘기들이 날아오르고.

영영 멈춰 있을 것만 같던 시곗바늘이 마침내 버스 출발 10분 전을 가리켰다. 멈춰 있는 것은 시계가 아니라 나였다. 그 시계 아래에서 내가 기다리고 싶은 이는 5년 뒤, 10년 뒤의 나일 것도 같았다. 직선의 시간을 거스르며 종횡무진하는 여행의 상상과 환상. 슬슬 배가 고파지는 11시39분이면 그 겨울, 러시아의 작은 마을 수즈달(Suzdal)로 가기 위해 경유했던 블라디미르 버스터미널 외벽 시계가 떠오른다.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낯선 장소로 떠나기 위해 기다리던 그 시간들은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웠는가.

먼 나라 여행이 고파지는 여름철이다. 그 시계가 아니었다면 낯선 터미널 식당에서 서둘러 먹었을지도 모르는 감자 요리를 하는 것으로 이 덥고 습한 계절, 11시39분의 허기를 달래본다. 감자를 채 썰어 잠시 물에 담가둔다. 그동안 양파와 토마토, 마늘을 잘게 썰어 올리브오일에 볶고, 볶은 재료는 그릇에 담아 놓는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감자채를 평평하게 부어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고 전을 부치듯 앞뒤로 노릇하게 익힌다. 그 위에 볶은 재료를 올려 오므라이스처럼 반으로 접어 그릇에 담으면 끝이다. 안에 치즈를 함께 넣거나 계란을 써도 되지만, 깔끔한 맛을 원한다면 이대로 고수나 딜, 로즈마리 같은 허브를 뿌려 내는 것으로 충분하다.

11시39분에 요리를 시작한다면 수즈달로 떠나는 12시30분 버스가 오기 전에 느긋이 먹고도 남을 만큼 쉽고 간단하다. 감자 요리는 대개 이렇듯 쉽고 또 다양한 버전으로 응용해 먹는 즐거움이 크지만, 여러 나라에서 먹어본 감자 요리 생각에 여행병이 더 도지는 건 책임질 수 없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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