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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순결한 나라, 정의로운 역사라는 판타지

천지우 논설위원


철거 직전의 낡은 아파트에 택시기사 용현이 입주한다. 고아로 커서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이 남자는 본인 집에서 30년 전에 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아직까지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웃집 여자와 바람난 사내가 부인을 죽이고 갓난아이를 버려둔 채 달아난 사건이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현재와 무관하지 않다. 그때 버려진 아기가 용현이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참한데 용현이 다른 인물들과 맺는 관계와 그 결말은 훨씬 기구하고 끔찍하다. 부모 세대에서 시작된 악업은 더욱 참혹한 방식으로 자식들에게 대물림된다.

2001년 제작된 영화 ‘소름’의 내용이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보면서 영화의 무대인 흉물스러운 아파트가 한국사회 자체를 상징한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대를 이어 진행되는 이야기는 오욕의 한국 현대사가 된다. 시작부터 잘못된 탓에 계속 삐걱거리고 아픈 현대사 말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아내를 잃은 감독의 개인사도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영화를 봤던 20년 전에는, 한국사회가 첫 매듭부터 잘못 매서 온갖 악업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생각은 바뀌었다. 과거의 일은 말 그대로 지나간 일이다. 과거에 어떤 잘못이나 더러움이 있다면 반성하고 다시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면 되는 것이지, 과거의 부정적인 모습을 현재의 관점에서 씻어 없애는 일에 온통 매달리는 건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지난 1일 대선 출마선언을 한 뒤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새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 수립 직후 친일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이 합작한 지배체제가 유지된 탓에 나라가 깨끗하게 출발하지 못했다는, 즉 첫 매듭을 잘못 맸다는 얘기다. 이 발언이 보도된 뒤 비판도 많이 나왔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다. ‘그때 순결한 통일 민족국가가 세워졌다면 훨씬 정의롭고 떳떳했을 텐데’라는 가정이고, ‘지금이라도 역사를 바로 세워야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밝을 것’이란 믿음이다.

1985년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을 주도했던 운동권 출신으로 지금은 횟집을 운영하는 함운경씨는 이 지사 발언과 관련한 소회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함씨는 ‘독재자 이승만이 친일청산을 못하고 친일파를 앞세워 분단국가를 만들었고, 미국에 빌붙은 사대 매국세력이 재벌과 관료를 등에 업고 지금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80년대 학번들의 현대사 인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현실에 맞지 않으면 생각을 바꾸는 게 맞다”며 자신은 생각이 바뀌었다고 밝혔다. 그는 임시정부를 계승한 이승만 등 건국의 아버지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고,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도 언론 인터뷰에서 함씨와 상통하는 언급을 했다. “냉전 반공주의와 친일세력을 결부시키는 이들은 한국 현대사를 정의롭지 못한, 잘못된 역사라고 주장한다.” 최 교수는 이런 역사 대신 민주화운동 세력의 역사를 세우겠다고 하는 현 정권의 인식을 두고 “너무도 조야하다”고 비판했다.

순결, 깨끗함, 정의로움. 좋은 말들이다. 그러나 잡된 것이 일절 섞이지 않은 순결한 나라와 100% 정의로운 역사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그것을 현실에서 찾는 건 결벽증이다. 그런 판타지적 역사관이 예전의 특정 시기에는 시대정신이었을지 몰라도 현재의 세상살이엔 도움이 될 리 없다. 달라진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생각을 바꾸는 게 옳다.

지난 8일 정부 정책포털 ‘대한민국 정책브리핑’에 게재된 카드뉴스 한 장이 SNS상에서 사람들 입길에 올랐다. “쇠퇴하는 일본, 선진국 격상 대한민국” “일본 국력저하 지속, 한국 국력은 비약적 성장”이란 문구 때문이었다. 정부 공식 사이트에 올리기엔 낯간지럽고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나중에 일본 관련 표현이 뭉텅 삭제됐다. 어쨌거나 원문의 내용 자체가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일본이 예전만 못하고 한국이 선진국 된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된 것 아닌가. 오욕의 역사를 딛고 영광스러운 시대를 열었으니 과거 청산과 새로운 출발에 계속 집착할 필요는 없지 않나.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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