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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1611년 3월, 광해군 3년의 일이었다. 별시 대과를 통과한 33명이 임금 앞에서 전시(殿試)를 치렀다. 고급관리 선발의 주요 통로인 과거시험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다. 문과는 소과, 대과로 나뉜다. 소과 초시에서 700명, 복시에서 100명을 선발한다. 대과도 초시와 복시로 구분하고, 복시까지 치러내면 33명만 남는다. 이들이 임금 앞에서 치르는 최종시험이 전시다. 전시에선 당락을 가르지 않지만 등수를 매겨 진출하는 관직에 차별을 준다. 전시의 시험과목 가운데 하나는 책문(策問)이다. 임금이 문제를 던지면 수험생들은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평균 12m 길이에 이르는 답안을 작성해 제출했다.

그해에 광해군이 낸 책문은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였는데 과격한 답안이 등장했다. 진사시에 합격한 지 10년째인 36세에 별시 최종합격을 눈앞에 둔 임숙영은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은 척신의 전횡을 꼬집고 직언을 금기시하는 세태를 한탄했다. 이어 “임금의 잘못이 곧 국가의 병”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분노한 광해군이 합격자 명단에서 임숙영의 이름을 빼라 지시하고, 관료들이 벌떼처럼 반발하면서 벌어진 ‘삭과 파동’은 4개월 뒤 임금의 항복으로 일단락됐다.

정치·사회·경제·외교·국방 등에서 복잡하고 다급한 현안을 다루는 책문은 사실 임금이, 국가가, 백성이 지금 원하는 ‘시대정신’은 뭔지 답을 찾아가는 고된 여정이다. 그래서 때로 목숨을 걸고 ‘답안지’를 제출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이다. 책문의 틀은 사라졌지만, 그 속에 담긴 치열함은 여전히 필요하다. 내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주권자인 국민과 시대는 묻고 있다. ‘가장 시급한 나랏일은 무엇인가’라고.

현재 출마를 선언한 대권 주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물음에 ‘공정’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뜻하는 수위는 제각각이다. 사실 공정을 외치지만, 출발선에서의 공정함이나 결승선으로 달리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불평등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보인다. ‘시험’의 결과물인 성적을 공정하다고 여기지만,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평평한 운동장을 달릴 수 없다는 현실을 애써 외면한다.

시대가, 국민이, 특히 청년층이 ‘공정으로 포장한 능력주의’라도 갈망하는 이면에는 ‘아비투스(Habitus)’가 엿보인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한 세대를 관통하는 ‘성향’ ‘관습’을 아비투스로 정의했다. 특정한 사회 환경에 따라 형성된 개인의 생각과 행동 패턴을 말한다. 우리 시대에 강력한 힘을 갖는 아비투스는 ‘뒤틀림’으로 보인다.

무너진 공교육을 사교육이 대체하고, 중학생 때부터 고교 국·영·수를 선행 학습하게 만드는 교육제도는 ‘동일한 출발선’을 불가능하게 한다. 학원을 몇 개 다니느냐, 서울 강남·목동에 있는 학원이냐 아니냐 같은 조건이 교육·경제 권력의 대물림을 보장하는 뒤틀린 교육제도는 ‘과정의 공정함’도 담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시작된 뒤틀림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고, ‘고인 물 사회’를 잉태하며, 능력을 평가하는 시스템마저 뭉갠다.

이 모든 뒤틀림을 만든 주범은 기성세대다. 586세대든, 그 이전과 이후의 세대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시대가 던질 책문에 대한 답은 ‘뒤틀림의 바로잡기’가 아닐까. 뒤틀린 교육·분배·일자리·성장구조를 바로잡지 않으면, 가까운 미래에 불평등이 부를 비극을 적나라하게 목격할지 모른다. 우리가 자주 잊는 ‘무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자연의 생태계, 조금 작게는 동물의 먹이 피라미드를 지탱하는 건 소수의 최상위 포식자가 아니라 넓고 두터운 아래층이다. 바닥이 부실해지면, 피라미드는 붕괴한다.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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