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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단골 이야기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천상병 ‘주막에서’ 부분) 1980년대와 90년대 초에는 문화 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단골집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내게는 서울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 옆 낙원동에 위치한 ‘탑골’, 인사동 수도약국 뒤편에 자리한 ‘평화 만들기’, 합정동 뒷골목의 선술집 ‘모모’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들 명소는 폐업한 지 오래됐고, 지금은 인사동 한정식집인 ‘지리산’ 가는 길목에 수줍게 숨어 있는 카페 ‘소담’만이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을 뿐이다.

국경일과 명절을 제외하고는 항시 글 쓰는 동업자들로 성시를 이뤘던 단골집에서 모주꾼들은 집을 잃은 고아 혹은 가출한 소년들처럼 밤늦도록 우정과 욕망이 뒤섞인 시간을 마시고 나눴다. 또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아 연을 맺기도 하고, 출판을 위시해 여러 거래가 이뤄지기도 했다. 상처 입은 동물들의 처소인 동굴처럼 그곳은 나날의 현실에서 패배한 자들이 찾아가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던, 또 하나의 아늑한 집이자 은신처였다.

단골 술집은 ‘기하학의 범주에 속하는 추상적 의미로서의 공간보다는 인간 신체와의 관련성 속에서 개인들이 부여하는, 구체적 일상의 호흡과 숨결이 느껴지는 가치들의 장소’(장정일)에 가깝다. 장소로서의 술집은 공간에서처럼 시간이 흘러서 확산되지 않고 모여서 정지돼 고이는 곳이다. 요컨대 장소에서는 경험과 추억이 교류하며 적층되는 것이다.

단골 술집에 가면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술잔을 비웠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일상에서 입고 지냈던 거추장스러운 어른을 벗고 천진과 무구의 어린이로 돌아가 허물없는 관계에 돌입했다.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마음속에나 자리하고 있는 그 흐린 불빛의 옥호들! 팬데믹 장기화로 지인들과 만남조차 어렵게 된 요즈음 문득문득 그날의 단골집들이 눈에 삼삼하게 떠오르곤 한다.

열혈청년 시절 내가 즐겨 찾던 단골집은 파고다공원 뒤편 골목에 있었던 ‘탑골’이라는 술집이었다. 그곳엔 주로 주머니가 허전한 시인, 작가, 화가들이 드나들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 아무 때나 들르면 아는 얼굴들이 한둘쯤은 있어 굳이 약속을 잡지 않아도 술판을 벌일 수가 있었다. 흥이 나면 노래도 부르고 더러는 사소한 언쟁이 번져 주먹다짐이 벌어지기도 했다. 군사정권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그곳은 우리의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당시 나는 시골에서 적수공권으로 올라온 상경파 중의 하나로 사고무친인 서울이 막막하고 두려워 아늑한 쉼터가 필요했다. 또한 이십대 후반의 달아오른 피를 식힐 곳이 필요했는데 ‘탑골’만한 곳이 없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상임 간사를 거쳐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출판사 ‘청사’에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었던 나는 퇴근하기 무섭게 예의 아지트로 달려가 동업자들과 어울려 통음하다가 자정 무렵 자취방으로 퇴근하거나 더러는 술집 소파에 구겨진 신문처럼 엎어져 잠이 들었다가 아예 그곳에서 출근하는 때도 있었다. 주인은 내 또래 여인이었는데 우리에게는 친누나 혹은 이모 같은 존재였다. 그 술집은 매상을 그런대로 올렸으나 가난한 예술가들의 외상값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수년을 버티다가 결국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충북 청주로 거처를 옮긴 주인이 자신을 파산시킨 예술가들이 그리워 다시 올라와 개업했으나 같은 이유로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술이 고파오면, 가난하고 고단했으나 더없이 아름다웠던 우리 한때의 몽마르트르였던 그곳, 토굴같이 음습했으나 사람의 온기로 따뜻했던 술집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이제는 시대의 뒷방 신세로 전락한 그날의 우정들이여, 옥체 보전하시기 바란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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