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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김홍규, 그대 이름은 지역활동가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우리 주변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분이 많다. 김홍규(1929∼2017) 선생이 그런 분이다. 김 선생은 춘천YMCA의 상징과도 같다. 그는 6·25전쟁 직후 혼란한 시절에 방첩대 문관으로 강원도 춘천 일대를 휘젓고 살았다. 주먹 쓰고 술 마시며 거칠게 생활했다. 그러다가 예수 믿은 후 하루아침에 순한 양같이 바뀌었다. 1962년 얼떨결에 춘천YMCA 총무가 됐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소명으로 믿고 순종하기로 했다.

당시 YMCA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었다.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총무가 가는 곳이 곧 YMCA요 회관이었다. 김 총무의 땀과 눈물에 힘입어 춘천YMCA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 무렵 춘천에는 수많은 청소년이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으로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춘천YMCA는 이들을 위해 직업학교를 개설했다. 김 총무는 폐차 버스에 YMCA 간판을 달고 넝마주이 소년들과 함께 생활했다. 영세민을 위한 무료 장의차 사업을 시도했고,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멋지게 성공하기도 했다. 신화 같은 이야기도 많다. 어느 대기업 회장의 사모가 교회 권사라는 말을 듣고 3개월 동안 서울 집을 끈질기게 드나들며 호소한 끝에 춘천의 노른자위 땅 30평을 기증받았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춘천YMCA는 번듯한 5층짜리 회관을 소유하게 됐다. 당시 춘천에서 랜드마크가 될 정도의 건물이었다.

김 선생은 춘천YMCA 총무 일을 하면서 보수를 받지 않았다. 무보수 헌신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최고의 봉사라는 믿음에서였다. 사실 그의 정식 직함은 ‘명예 총무’였다. 이러한 진정성이 사람들의 믿음을 샀다. 그의 행동이 다소 투박하고 무리가 있어도 그냥 받아주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김 선생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춘천의 유명한 지주 집안 출신인 부인이 밤새 뜨개질해서 생활비를 벌었다. 생활이 고되니 부부 싸움도 잦았다. 육박전에 가까운 격렬한 싸움 끝에 부부는 서로 붙들고 엉엉 울었다. 사글세 단칸방이라 어린 아들도 옆에서 같이 울었다.

김 선생은 말년에 오래 앓았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그는 숨을 거두기 며칠 전 아들에게 “내가 잘 산 걸까?”라고 물었다. 그의 장례식장에 강원도 전역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1만원짜리 조의금 봉투가 수북이 쌓였다. 아들 눈에 아버지는 ‘멋진 인생’을 살았다.

그 아들이 일본에서 막노동하며 고학한 끝에 경제학 교수가 됐다. 그도 아버지를 닮아 성정이 뜨겁고 괄괄하다. 아들 김종걸 교수는 ‘사람 중심의 사회적 경제’를 일으켜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한다. ‘협동조합 기본법’은 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김 교수는 ‘미래혁신학교’를 세워 사회적 경제 활동가들을 후원, 육성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가 쓴 ‘자유로서의 사회적 경제’라는 책에 ‘동자동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서울역 건너편,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빌딩 한편에 쪽방촌이 있다. 월세 20여만원을 내고 한평 남짓한 쪽방에 사는 사람이 1000명이나 된다. 대다수가 기초생활수급자다. 그들은 아무리 사정이 급해도 돈 빌릴 곳이 없다. 2011년 쪽방촌 주민 136명이 조합비 1000만원을 모아 마을은행 ‘사랑방 마을 주민협동회’를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2019년 한 해 동안 532건, 총액 1억4564만원의 대출이 있었다. 10만원 이하가 절반이다. 놀라운 것은 대출 상환율이다. 첫해 66%이던 것이 매년 꾸준히 올라가 2019년에는 89%를 찍었다. 쪽방촌 사람들이 주민협동회를 통해 자신의 삶에 책임감을 갖게 됐다.

이 모든 게 절로 된 것은 아니다. 엄병천 선동수 박승민 등 ‘꼴통’ 활동가들의 노고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은 그야말로 ‘뼈를 갈아 넣으며’ 일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에게 물리적인 배고픔은 대수가 아니다. 그러나 무관심에서 오는 허기는 가슴을 후벼팔 정도로 아프다고 한다.

걸핏하면 우리 현대사를 폄훼하는 인간들이 있다. 일제가 그랬다. 우리 민족을 ‘엽전’이라며 자학(自虐) 사관을 강요했다. 광복절이 있는 이 8월에는 김 선생 같은 지역활동가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것 아닌가. 안도현 시인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지 되물어볼 시점이다.

서병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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