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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심야택시 블루스

문수정 산업부 차장


늦은 밤 택시를 탔다. 뒷좌석 문을 여니 열대야를 실감할 수 없는 쾌적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긴팔 셔츠에 조끼까지 입은 나이 지긋한 기사님이 “더우시죠”라며 인사말을 건넸다. 차량의 에어컨은 풀가동되고 있었다. 적막한 서울 여의도의 밤을, 초조한 대기의 시간을, 라디오의 음악 소리와 에어컨 소음을 벗 삼아 견뎌내던 기사님은, 지쳐서 택시에 몸을 싣는 야간 근로 노동자를 무척이나 반겼다. 덥지 않으냐는 그의 질문에 “안녕하세요”라는 동문서답을 하며 문을 닫았다.

밤늦게 택시를 타는 날엔 꼭 빵과 음료를 챙긴다. 회사 앞에서 빠져 나와 강변북로를 타기 직전에 신호가 걸리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신호대기 시간은 어색하게 무릎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빵과 음료를 기사님께 건네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쭈뼛대며 “저기… 이거…” 하고 내밀면 “아이고, 손님이 드셔야죠” 하며 사양하기 일쑤다. 주저하는 표현은 수줍은 대답을 부를 뿐이다. 상대가 사양하지 못하게끔 저돌적일 필요가 있다. “밤늦게 피곤하실 텐데 이거 드세요”라고 단호하게 건네면, 대개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잘 먹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해준다.

요즘 택시 뒷좌석 문에는 ‘마스크 미착용 시 탑승 금지’와 같은 경고 문구가 붙어 있다. 이런 게 적혀 있지 않으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랬을 것이다. 경고를 받으며 택시를 타면 약간 긴장이 된다. 마스크를 제대로 썼는지 다시 확인하게 되고, 기사님은 잘 썼는지 살펴보게 된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과 늦도록 일하다 지친 사람이 묘한 긴장을 주고받는 탑승의 순간. 잠시 후 빵과 음료가 등장하면 긴장은 사라지고 편안함이 찾아드는 걸 매번 느낀다. 신호가 바뀌고 마포대교를 향해 부드럽게 좌회전하는 택시의 움직임을 느끼면, 하루가 무사히 끝나간다는 시그널을 받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스민다.

강변북로를 달리던 써늘한 택시 안에서 에어컨 온도를 높여 주십사 청했다. “기사님, 춥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에 “손님들 더우신 게 더 걱정이죠”라는 답을 받았다. 오랜만에 낯선 사람과 작은 배려를 주고받으며 편안한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종종 극단적인 감정을 목격하곤 한다. 화가 난 사람들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잠깐 문밖을 나서는 데도 강도 높은 불안을 느끼는 것 같다. 이웃은 언제든 내게, 나는 언제든 다른 이들에게 감염병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어느 것 하나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 점점 더 ‘매운맛’의 분노를 터뜨린다. 그걸 지켜보고 분석하고 기사로 전하는 일을 하면서 가끔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중간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날 택시 안 최적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 차 안에서 계속 에어컨을 켜고 있던 기사의 온도와 무더위를 뚫고 택시로 들어온 손님의 온도는 결코 단숨에 일치될 수 없을 것이다. 더워서 못 견디는 사람과 추워서 괴로운 사람이 한 공간에서 짧게 대치하는 순간, 초면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짜증을 냈다면 어땠을까도 싶다. 추위와 더위 사이에서 적당한 온도를 찾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빵과 음료로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시간, 더운 손님을 위해 에어컨 냉기를 참는 시간, 지나치게 쾌적한 차 안의 공기를 모두가 편안하게 바꿔보자고 건의하는 시간을 지나야 했다. 감염병의 시대, 들끓는 불안과 치미는 분노 또한 적정 온도를 찾아가게 되기를 바라본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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