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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나의 두발 수난기

최여정 문화평론가


#2㎝ 단발머리 : 지각이다. 저 멀리 서서히 닫히는 학교 정문이 보인다. 사실 두려운 건 지각 체벌이 아니라, 학생 주임 선생님의 ‘자’다. 본디 자란 것이 ‘길이를 재는 데 쓰이는 도구’일 뿐인데,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그녀의 자는 무엇이든 잰다. 치마 밑에 드러나는 무릎 위에도, 초승달 같은 손톱 위에도 자는 종횡무진 활약한다. 내 귀밑, 삐죽 튀어나온 머리카락 위에 올라간 자는 정확하게 2㎝가 넘는다. 여중을 다녔던 3년 내내 나는 숨 막히는 2㎝와의 싸움을 했다. 귀밑 2㎝는 학교생활의 모든 기준이었다. 2㎝ 안에 들어오는 학생은 가정과 학교의 모범이요,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마치 사회 부적응자가 될 것 같은 우려와 걱정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그렇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나의 소원은 그저 저 2㎝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내가 졸업 후 20년이 넘도록 학생의 머리 길이는 여전히 감시하에 있었고, 불과 2년 전인 2019년이 돼서야 두발 자유화가 됐다는 사실.

#미스코리아 사자머리 :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TV로 시청하던 시절이 있었다. 1957년 첫 대회가 시작된 이후, 여성 몸의 상품화라는 이유로 2002년 TV 중계가 폐지되기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미녀의 탄생을 온 가족이 지켜봤다. 똑같이 파란색 수영복을 입은 그녀들은, 똑같은 긴 파마머리를 한껏 부풀리고 걸어 나왔다. 마치 사자처럼 위풍당당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짧은 머리의 미스코리아는 없었다. 그 시절 미스코리아 등용문은 바로 미용실 원장님이었다. 무릇 미인이란 숱 많고 긴 머리를 나부껴야 한다는 공식은 참으로 오랫동안 지켜졌다. 중고등학교 내내 2㎝ 안에서 몸부림치던 수많은 여학생은 반작용처럼 그 긴 머리의 세계를 꿈꾸었고, 남학생들은 ‘여자는 긴 머리지’라는 취향 없는 미적 기준이 만들어질 때였다.

#아나운서 단발머리와 승무원 올림머리 : 대학 졸업사진 시즌이 다가오자 학교가 술렁인다. 그 사진의 위력은 대단했다. 엄마 때는 그 사진으로 맞선 시장에 나가 배우자를 찾기도 했고, 나는 졸업사진을 들고 취업 시장에 나가야 했다. 어찌 됐든 여성에게 원하는 ‘참하고 좋은 인상’의 순간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이 총동원됐다. 그때 마치 메뉴판처럼 등장하는 것이 ‘아나운서 단발머리와 승무원 올림머리’다. 마치 그런 머리 모양은 사회 진입의 통행권 같았다. 전문직 여성의 상징처럼 대표되는 아나운서는 왜 온통 단발머리이며, 서비스의 꽃인 승무원들은 왜 또 엄격한 올림머리를 해야 할까. 도대체 이런 단어 조합이 세상 또 어디에 있기나 한 걸까. 대학 졸업 후 배낭여행을 다니며 나는 알았다. 해외 뉴스 방송의 여자 아나운서들, 해외 항공사 여승무원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중학생 때부터 직업인이 되기까지 그 오랫동안 여성의 헤어스타일과 외모의 규범 안에서 살았다는 뒤늦은 자각.

#안산의 쇼트커트 : 도쿄올림픽 양궁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의 쇼트커트 논란이 화제였다. ‘짧은 머리의 여자는 페미니스트’이고, ‘페미니스트는 메달을 반납’하라는 이 놀라운 비약적인 논증법에 안산 선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쇼트커트가 편하니까요’. SNS에는 이미 ‘쇼트커트의 찬미’가 넘쳐난다. 역사상 인류는 단 한 번도 머리카락을 가만히 둔 적이 없었다. 이집트에서는 남녀 모두 머리를 밀고 가발을 썼고, 그리스 남자들은 파마를 했으며, 프랑스 여자들은 우리의 가채처럼 머리를 1m 높이로 만드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문화와 사회의 기준에 따라 헤어스타일은 변화를 거듭했지만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라는 고정화된 이미지를 요구했고, 받아들였다. 그러니 쇼트커트=페미니스트라는 연상을 하는 남성들을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알 때가 되지 않았나. 머리카락 길이 따위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을. 미안하지만 긴 머리 찰랑거리는 페미니스트도 많다는 사실.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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