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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아이를 병원에 두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수술하면 된다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오늘 같은 날은 옆에 있어 주고 싶은데 당일 알바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자영업자에게 연차나 반차가 있을 리 없지. 착잡한 심정으로 계산대 앞에 섰는데 역시 어수선하다. 청소 상태를 지적하며 괜히 알바생에게 짜증을 내고 오늘따라 금전출납기는 왜 이러는 거냐며 애꿎은 기계에 화풀이한다. 평소에는 무심히 넘길 수 있는 일도 자꾸 신경에 거슬린다. 아이가 아픈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아픈 건가.

그러다 사고를 쳤다. 손님이 계산대에 상품을 툭 내려놓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휴∼’ 하는 얕은 한숨이 나왔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집에 좋지 않은…”이라고 해명할 틈도 없이 손님은 상품을 그대로 두고 편의점을 나갔다. 찬바람이 스쳤다. 나도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게다가 우리 편의점 단골손님인데, 그렇게 화를 내실 건 또 뭐람. 되레 야속하단 생각마저 들었다. 이래저래 오늘 근무는 꽝. 이런 날은 쉬고 싶지만 역시 도리가 없다. 8시간을 버텨야 한다.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에는 발명가를 꿈꾸는 9살 어린이가 등장한다. 거기에 이런 아이디어가 있는데 사람의 피부색을 감정에 따라 바꿔주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분홍, 화가 나면 빨강, 우울하면 파랑, 흥분하면 초록, 짜증 날 땐 갈색 피부로 말이다. 그래서 파랑이 된 사람은 슬그머니 피하고, 분홍으로 반질거리는 친구를 만나면 “축하해!” 하면서 등을 두드려줄 수 있다나.

기발한 상상이라 웃겠지만 나도 비슷한 발명(?)을 떠올린 적 있다. 편의점 명찰 귀퉁이에 ‘오늘의 감정’ 표시란을 두는 것이다. 기분이 좋으면 웃는 스티커를 붙이고, ‘지금 우울해요’라고 알리려면 입을 꾹 다문 표정을 그려 넣고, 무덤덤한 얼굴, 울고 있는 눈망울, 눈썹이 치켜 올라간 스티커도 있었으면 좋겠다. 손님을 비롯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명찰을 달고 다니면 어떨까? 기쁨, 슬픔, 피곤, 울적, 짜증, 분노의 상태를 드러내 알리는 것이다. 그럼 서로 알아서 응원하고 피하면서 지구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을까? 맞아요. 엉뚱하단 사실, 저도 알아요.

감정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다닐 수는 없으니 우리는 늘 헤아리고 조심한다. 내 상황을 알아 달라 호소할 수 없으니 애써 평상을 유지하고, 혹 유별난 반응을 보더라도 상대에게 사정이 있으리라 가늠하는 것이다. 활짝 웃는 표정 뒤에 그늘이 있기 마련이다. 무뚝뚝한 표정에는 조용히 사무적인 태도가 오히려 배려가 된다. 그렇다고 모든 걸 껴안을 순 없겠지만 대체로 너그러운 입장에 서 보려 한다. 물론 내가 오늘 손님에게 했던 행동을 이해해 달라 고집할 수는 없겠지. 다음에 다시 오시면 “그때 죄송했어요”라고 먼저 말을 건네야겠다. 그분이 물건을 툭 내려놓은 행동에도, 휙 나가버린 쌀쌀함에도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처럼 가족을 병원에 두고 편의점을 찾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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