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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그 집을 생각한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돌아가신 어머니를 자주 생각한다. 멀리 떨어져 지냈지만 어머니의 집은 생생한 기억의 장소였다. 아버지가 퇴직하신 후 깊은 산속에 지은 집은 내게는 간혹 내려가는 휴양지였다. 내가 방문하면 어머니의 가사노동 강도가 달라진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내려가면 먹을 수 있는 어머니의 손맛 담긴 음식들은 입에 착 붙었다. 스무 살에 상경한 뒤 어머니가 만든 김치들은 서울의 밥상에도 올라왔다. 연로하시자 김치 간이 달라졌지만 다시는 못 먹을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리석었다.

그 집에는 마당이 있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빽빽한 산속인데도 마당에는 직접 심은 나무가 많았다. 아버지는 나무 가꾸시는 데 열심이었다. 막내인 내가 짓궂은 질문을 했다. 나무가 지천인데 왜 굳이 또 나무를 심고 고생하시냐고. 아버지가 내게 건넸던 답은 내 삶의 화두가 됐다. 숲의 나무는 대자연의 일이지만 마당의 나무는 심은 사람의 일이라고. 나무와 사귀는 것과 같다고. 가꾸면서 서로 닮아가고 좋아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이제 두 분이 없는 집은 무색무취 공간일 뿐이다. 더 이상 어머니가 만드는 음식 냄새도 없고 웃자라 무성한 나뭇가지는 대자연의 일이 됐다.

어머니 생각과 집을 떠올린 것은 한 권의 책을 읽은 데서 비롯했다. 하재영 작가의 살아온 집에 대한 기록인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를 읽고 나서 내가 살았던 집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리고 그 집이 윤기 나도록 만들기 위해, 가족의 일상이 문제없이 영위되도록 종일 노동에 시달린 어머니를 가슴 저릿하게 새삼 느낀 것이다. “집은 우리에게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이 쉼터이기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집은 일터가 되었다.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노동의 현장이었다.” 작가의 어머니는 문학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지만 자기만의 방에서 책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작가가 어린 시절,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은 시간에 집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나섰다가 이층의 불 꺼진 방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웅크려 앉은 엄마를 발견했다. 반가움에 전등을 켜자 “불 꺼, 나가”라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어린 그녀는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고. 엄마의 목소리가 차가워서가 아니라 말끝에 묻어나는 울음기 때문이었다.

내게도 작가의 이런 회상과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다. 엄마는 씩씩한 여성의 표상이었다. 일곱 식구의 식사나 행사 등을 도맡았던 어머니는 한 번도 힘없는 목소리를 낸 적이 없다. 그런데 할머니를 잃은 날 저녁에는 아예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낯선 엄마가 두려워 겨우 말을 걸었을 때 쉰 목소리로 들리지 않을 듯 답했을 뿐이다. 어머니에게 다른 모습이 있다는 건 놀라웠다.

이 책은 집이 사람, 특히 여성에게 미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독립적인 여성의 삶을 위해 떠돌았던 원룸, 투룸의 세계는 우리 시대 주택의 변천사와 함께, 한 시대를 공유하게 만든다. “내가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작가의 고백은 집이 삶의 배경이자 가족의 뼈대를 만든다는 증언과 같다. 작가는, 집이 우리를 본다고 느낀다. 사람이 들고나는 셋집은 얼마나 많은 인생을 목격했을까. 작가의 집은 홀로 서려는 한 여성의 분투, 상실과 좌절, 연애를 목격했을 것이고, 그런 집을 기록하는 것은 다시 그 집을 살아보는 것이라고.

어머니의 마지막 집은 내가 함께 살지 않은 집이다. 다만 꽤 오랫동안 어머니의 노동을 연장시키며 내가 쉬었던 집이다. 내가 만들고 가꾼 것 하나 없이 평안을 누렸던 공간이었다. 너무 늦게 그 집에서 입맛의 호사를 누린 것이 부끄럽다. 어머니의 자리를 내가 그렇게 정했다는 사실이 불효다. 어머니가 내게 일하는 여성이 되라고 강조했던 것은 당신의 삶을 닮지 말라는 의미였을까. 생전에 물어보았을 것을, 나는 질문 없이 그 품 안에서 안주했었다. 이렇게 어머니에게 유독 이기적인 딸이 되라는 말씀은 아니었을 텐데. 집을 떠올리며 어머니 생각에 고개를 숙인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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