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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논단] 탈레반 귀환이 일깨운 것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2001년 9월 11일, 미국 애틀랜타의 초가을 아침은 상쾌했다. ‘세계화의 이해’ 수업 시간에 들어서자 사뭇 다른 분위기가 펼쳐졌다. 근심과 공포에 가득 찬 표정들이 브라운관을 주시했다. 세계무역센터가 화염에 휩싸였고, CNN은 항공기 납치 소식을 분주히 전했다. 담당 교수는 학생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뉴욕에 가족이 있는지, 방문 중인 친지는 없는지 연신 물었다. 교수라기보단 노련한 심리상담사 같았다.

이윽고 트윈타워가 무너져 내렸고, 우리 모두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이슬람 테러 집단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서구 문명과 자본주의의 상징인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미국 군사력의 심장 펜타곤을 함께 노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본토가 처음으로 공격받았고, 2977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2년 차 유학생의 뇌리에 테러리즘의 야만이 생생히 각인된 순간이었다.

꼭 20년이 지난 지금, 그 끔찍했던 야만이 귀환했다. 이번엔 알카에다의 혈맹인 탈레반이다. 알카에다의 수괴 빈 라덴 일당에게 근거지를 제공하고, 함께 훈련하고 테러를 모의한 바로 그 무장세력이다. 미군 철군, 부패 정부, 오합지졸 군경이 삼박자를 이루며 만들어진 군사력과 권력 공백을 틈타,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이들의 카불 입성은 너무나 빨랐고, 놀라울 만큼 평화로웠으며, 이 덕에 믿기지 않는 초현실로 다가온다.

CNN 앵커 자카리아는 ‘미국의 아프간 전쟁’ 저자 카터 말카시안의 해석을 빌려 탈레반은 믿음, 하늘, 이교도 척결을 위해, 아프간 정부군은 돈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탈레반이 20년 만에 ‘총성 없이’ 카불에 입성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강조한 거다. 탈레반의 일인자 아쿤드자다의 23살 아들이 스스로 자살 폭탄 테러를 벌여 반미 전투에 불을 댕긴 일화는 신앙의 힘과 야만의 본질에 대해 되묻게 한다.

탈레반의 또 다른 권력 실세 시라주딘 하카니는 뉴욕타임스 기고 글을 통해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난 “새롭고 포용적인 정치 시스템”을 천명했다. 모든 아프간 주민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고, 실력을 바탕으로 동등한 기회를 갖는 이슬람 국가를 만들 거라 공언했다. 이슬람이 허용하는 선에서 여성의 교육권과 일할 권리를 보장할 거라 적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아는 대로다.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낮에 여성이 총살당하고, 경찰 고위 간부가 기관총으로 살해돼 그 영상이 트위터를 떠돌고 있다. 아프간 국기를 든 시위대가 총격으로 사망하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시민들이 몽둥이에 얻어맞는 무법천지가 연출되고 있다. 지도자들의 공언쯤이야 단박에 무시되는 콩가루 집안인지,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원래가 그런 집단인지 아직은 알 도리가 없다. 분명한 건 문명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거다.

중동국가의 분쟁과 내전이 대한민국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는 이유는 뭘까. 빈 라덴 사살을 모티브로 한 ‘코드네임 제로니모’, 미국의 아프간 침공을 다룬 ‘12 솔져스’ 같은 전쟁 영화에서나 봄 직한 폭력과 야만이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펼쳐지고 있는 이 믿기 어려운 현실 때문일지 모른다. 야만적인 우리의 본성이 나도 모르게 조건반사 하는 건 아닐까.

합리적인 이유도 있다. 무능한 아프간 정부, 오합지졸 정부군에 더해 230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을 쏟아붓고도 철군을 택한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바라보며, 우리의 국방과 동맹을 돌아봐야 한다는 주장이 눈에 들어온다. 여성들의 삶이 다시금 끔찍한 전근대적 야만으로 복귀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여성의 권리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하릴없이 무너지는 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을 마주하며, 여성들과 양심적인 시민들이 깊게 우려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남의 나라 일에 무관심해졌다. 언론, 정치권, 국민 모두 그렇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이런 경향은 더 견고해졌다. 다른 영토의 확진, 사망은 말 그대로 ‘딴 나랏일’이 됐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건 인권이 무너지건 알 바 아니라는 무관심이 팽배하다. 난민들은 문전박대당하기 일쑤다. 이런 터에 아프간 주민과 여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신기하고 또 반갑다. 우리를 돌아볼 소중한 기회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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