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최현주의 밥상+머리] 당근의 부캐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 공쿠르상은 한 작가에게 두 번 수여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이 상을 두 번 받은 소설가는 로맹 가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번은 로맹 가리, 또 한 번은 에밀 아자르가 받았다. 1975년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한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가 1956년 ‘하늘의 뿌리’로 이미 공쿠르상을 받은 중견작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은 그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한 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 외에도 여러 개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무슨 심사로 죽을 때까지 시치미를 뗐을까? 자살하기 몇 달 전 라디오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그 속내를 짐작해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에 관해 쓰는 모든 것에서 매일 나를 보지만 나는 내가 끌고 다니는 그 이미지 속에서 결코 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진 이미지와 명성, 평론가들의 섣부른 비판과 평가 기준에서 벗어나 자신을 완전히 표현하고 싶었던 소설가. 그는 소설가였고, 변호사였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공군 대위였고, 외교관이었으며, 영화연출가이기도 했다. 로맹 가리는 하나의 이름 안에 갇히기 힘든 멀티 페르소나의 소유자였다.

2019년 말 무렵부터 ‘멀티 페르소나’라는 키워드가 뜨더니, 급기야 지금은 ‘부캐’의 전성시대가 됐다. TV 예능 프로그램으로 시작된 부캐 놀이는 유튜브로 옮겨와 젊은 세대들의 문화가 됐다. 유야호, 유산슬, 닭터유도 신박하지만 만화처럼 커다란 눈망울과 뽀얀 피부를 가진 남성 듀오 아이돌 ‘매드몬스터’의 출현에 나는 포복절도했다. 세상은 이제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드러내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개그맨 이창호씨는 매드몬스터의 제이호이고, ‘김갑생할머니김’의 이호창 본부장이며, ‘한사랑산악회’의 이택조 부회장이다. 이들은 서로 다른 세계관 속에 존재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불평하지 않는다. 로맹 가리가 2021년의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굳이 조카에게 에밀 아자르를 연기하도록 시키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냉장고에 남은 당근을 꺼내 당근 스테이크를 하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로맹 가리를 생각한다. 잡채 같은 볶음요리나 국물요리에 들어가는 맥 빠진 당근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당근을 좋아하게 된 요리. 요리치고는 너무 간단하지만, 맛은 보장할 수 있다. 당근을 반으로 길게 잘라 소금과 후추로 간하고 올리브오일을 뿌려 오븐이나 에어 프라이어에서 구우면 끝이다. 굽는 시간에 따라 포크로 긁어먹을 수 있을 만큼 무르고 촉촉하게 되기도 하는데, 물에 빠져 물컹하게 된 당근과는 그 무름에 차이가 있다. 기호에 따라 굽는 정도를 조절하고, 발사믹 크림을 뿌려 먹어도 좋다. 스테이크답게 팬과 나이프를 이용해 먹는다. 또한 스테이크답게 가니시를 곁들이는 게 좋다. 깍둑 썬 두부튀김이나 고기 고명, 샐러드 등등. 그렇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이 식탁의 세계관에서 주인공은 당근이다. 새로 발견한 당근의 부캐, 메인요리로서의 당근의 페르소나에 나는 정말 반했다.

최현주 카피라이터·사진작가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