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매혹시킨 ‘프랑스 詩 강의’… 그리운 황현산의 목소리

[책과 길] 전위와 고전, 황현산 지음, 수류산방, 648쪽, 2만9000원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16년 초 황현산 전 고려대 교수가 서울 종로구 동십자각 앞에 있던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이 기획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에서 강의하고 있다. 수류산방 제공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을 받았다. 황현산(1945∼2018) 전 고려대 불문과 교수의 3주기를 맞아 출간된 ‘전위와 고전’이다.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16년 초 인문공동체 시민행성 기획으로 마련된 연속 강좌 ‘프랑스 상징주의 시 강의’를 묶은 강의록이다. 그가 시민 대상으로 펼친 최초의 프랑스 시 강의이자 생애 마지막 강의가 되었다.

책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황현산이라는 그리운 어른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는 반가움, 그리고 프랑스 상징주의 시라는 곤혹. 프랑스 시라니, 게다가 상징주의라니, 책을 펼쳐볼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선생이 황현산이라면? 그 다정하고 섬세한 지성에 기대 몇 페이지 정도는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난생 처음 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런지 모른다.

황현산은 불문학자이자 ‘황현산 번역’ 그 자체가 독자에게 선물이 되는 번역가였고, 젊은 시인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 문학평론가였다. 대학의 선생, 시인들의 선생이었던 그는 정년 퇴직 후 시민들의 선생이 되었다. 2013년 칼럼집 ‘밤이 선생이다’ 출간을 계기로 황현산을 발견한 시민들은 그를 ‘밤의 선생’이라고 불렀고, ‘황현산 현상’이라고 할만한 팬덤이 형성됐다.


그의 1주기에는 트위터 글을 모은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가 나왔고, 2주기에는 평론집 ‘황현산의 현대시 산고’가 출간됐다. 세 번째 유고인 ‘전위와 고전’은 5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책이다. 녹취한 강의를 최대한 육성에 가깝게 풀었고, 여기에 엄청난 분량의 주석을 붙였다. 도판과 사진 자료도 충실하게 챙겨 넣었다. 지질과 표지 디자인, 장정 등 책의 만듦새에서도 남다른 공력이 느껴진다.

강의는 여섯 번에 걸쳐 진행됐다. 샤를 보들레르로 시작해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로트레아몽 백작, 폴 발레리를 지나 기욤 아폴리네르로 끝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 사이에 활동했던 프랑스 시인들이다.

황현산은 각 시인들의 대표적인 시들을 읽어가며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끌고 간다.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난해하고 추상적인데다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이들의 시가 왜 현대 시와 미학, 현대성을 열었다는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황현산은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의식과 논리로 보는 주지주의적 경향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랭보처럼 설명이 불가능한 시” “로트레아몽처럼 혼돈 그 자체인 시”를 적극 옹호한다. 그런 시들은 육체의 감각으로 세상의 현실을 느끼고,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려고 한다. 그래서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낯설다.

“문제는 감각입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 감각이 육체에 남겨 놓는 인상, 감각이 우리 육체에 찍어 놓은 모든 흔적을 통해서 감각 너머의 세계를 본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시를 쓰는 말라르메와 꽉 짜인 지성적인 시를 쓰는 발레리를 비교하는 대목에서 시에 대한 황현산의 생각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성으로 사물을 분석하고 종합해서 결론을 내는 능력으로 보자면 발레리가 자기 스승 말라르메보다 열 배는 탁월할 것입니다… 말라르메도 만들어서 시를 씁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만드는 방식은 다릅니다… 발레리는 언어의 세계, 수학의 세계, 계산과 논리의 세계에 들어가더라도 정밀한 지도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그런 지도를 들지 않습니다. 거의 사물과 맨몸으로, 생짜로 부딪치다시피 해서 시를 만들지요… 발레리의 작업은 정교하지만 감동은 없습니다. 말라르메 경우는 똑같이 계산해서 지은 시라도 감동과 몽상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책에서 다루는 시들이 우리에게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유명한 시구는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행에 나온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이 함께 흐른다”라는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속 시구는 한 시절을 풍미했다. 하지만 잘못된 번역이다. 황현산은 시에 구두점이 없어서 빚어진 오역이라며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우리의 사랑을 나는 다시 되새겨야만 하는가”로 번역했다.

책 뒷부분에는 황현산의 지인과 후배들이 쓴 강의 해설, 인터뷰, 회고담 등이 수록됐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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