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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반골의 미학… “현재 삶 묵묵히 사는 곳이 무릉도원”

(16) 소정 변관식 ‘무창춘색’

변관식이 6폭 병풍으로 꾸민 ‘무창춘색’(1955, 종이에 수묵채색)은 평범한 농촌 풍경에 도원경의 이상향을 담은 것으로 해석이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복사꽃 흐드러지게 핀 시골 마을 풍경이다.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한가운데를 개천이 대각선 방향으로 흐른다. 돌다리 위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과 소녀가 있다. 뒷산 허물어진 성벽, 기와집의 기울어진 굴뚝, 아직 헐벗은 나무 등 묘사가 생생해 영화 장면 같은 이 병풍 그림은 소정 변관식(1899∼1976)이 1955년 가을 전북 전주 완산을 여행하며 그린 ‘무창춘색’이다. 실경을 사생해서 그리는 서화가 변관식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그림은 굴곡진 변관식의 인생에서 정점에 있던 시기에 그려졌다.

변관식은 구한말 3대 서화가인 소림 조석진(1853∼1920)의 외손자다. 조석진이 교수로 있던 최초의 근대미술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화가 인생을 시작했다. 조석진은 손주가 다른 길을 걷기를 바랐다. 그래서 공업전습소 도기과를 졸업한 변관식은 서화미술회에 처음부터 입학하지 못하고 뒤늦게 청강생 자격으로 참여했다. 어쨌든 이곳에서 미래 서화계를 짊어지는 김은호 이상범 이용우 노수현 등을 만나 교유하게 된다.

변관식의 삶과 화풍은 인생 내내 인기를 누렸던 청전 이상범(1897∼1972)과 대비된다. 청전은 1922년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출범 이래 관전(官展)이 키운 스타 작가로 떴다.

변관식도 선전에서 4년 연속 입상하며 화가로 이름을 알리긴 했다. 그 역시 선전의 영향을 받아 전통 산수화풍을 버리고 서양화 기법을 수용하는데 관심을 보였다. 선전 심사위원으로 한국에 온 일본 남화의 대가 고무로 스이운과 인연이 돼 일본 유학(1925∼1928년)도 다녀왔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신남화(新南畵)를 접했으니 일본인이 심사위원인 선전에서 당선되는 데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무슨 사연인지 29년 귀국한 이후 선전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기자이자 평론가인 안석주가 29년 8회 출품작에 대해 “변관식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요소인 완강한 필치를 엿볼 수 없다.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추느라 개성을 잃어가고 있으니 응모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혹평한 게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분석도 있다.

변관식은 이후 민간에서 주최하는 서화협회전에만 출품했고 전국을 주유하며 사생 여행으로 점철된 시기를 보냈다. 개성 평양 원산 광주 전주 진주 등 전국에서 체득한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붓질에 담아내고자 했다. 자신이 간사를 맡아 열정을 보였던 서화협회 전시회가 관전인 선전에 밀려 36년 해체된 후에는 아예 금강산에 칩거하다시피했다. 그때 삼선암 보덕굴 진주담 구룡폭포 옥류천 등 금강산의 명승지를 소묘하며 세월을 낚았다.

해방은 그런 그에게 기회가 됐다.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미술의 확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여했다. 49년 정부가 선전을 본떠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창설하자 심사위원으로 초대돼 중앙무대로 불려왔다. 그 무렵 그는 명승지가 아닌 평범한 농촌 풍경에 도원경의 이미지를 절충해 한국의 산천을 이상향으로 전환하는 ‘무창춘색’ 같은 그림을 다수 제작했다.

“지팡이를 든 노인과 머리에 짐을 얹은 소녀는 현재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시각적 장치”라고 미술사가 최경현씨는 해석한다.

하지만 6·25전쟁 후 재개된 54년 국전(3회) 때부터 파벌 문제를 제기하며 다른 작가들과 반목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56년(5회) 국전 심사 과정에서 국전의 중심 세력이었던 노수현 배렴 이상범과 의견 대립 끝에 노수현에게 냉면 그릇을 집어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59년엔 신문에 국전 심사의 내막을 고발하는 글도 기고했다.

변관식에게는 야인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 이후 그는 미술계의 중심에서 멀어져 주변인이 됐다. 서울 성북구 자택에 돈암산방이라는 화실을 마련하고 외롭게 그림을 그리며 수도여자사범대(현 세종대) 동양화과 강사로 후학을 길렀다.

운은 다시 왔다. 70대에 들어선 69년 변관식 고희기념특별전(예총회관화랑)을 기점으로 현대화랑 개관 1주년 기념전(1970), 현대화랑 초대 개인전(1974) 등이 이어졌다. 그의 작품에 ‘반골의 미학’ ‘아취성’ 등의 수식어가 붙으며 비평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77세에 별세하면서 그 운을 당대에 오래 누리지는 못했다.

변관식은 이상범과 마찬가지로 실경을 기조로 전통 산수화를 현대화했다.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청전이 경계를 흐릿하게 해 풍경을 추상화시킨다면, 소정은 아주 구체적으로 그린다. 그래서 ‘무창춘색’에선 집으로 돌아오는 소녀를 반기는 개가 어느 집에선가 컹컹거리며 튀어나올 것 같다.

청전이 물기를 듬뿍 머금은 붓을 사용해 어머니 젖무덤처럼 편안한 구릉이 있는 풍경을 즐겨 그렸다면, 소정은 물기 없는 갈필을 켜켜이 쌓아서(적묵법) 입체감을 표시하고 그 건조함이 계면쩍은 듯 촘촘히 묵점을 찍어 일종의 중화(파선법) 효과를 낸다. 소정의 그림을 보면 성격이 대쪽 같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남성의 붓질이 떠오른다.

소정에게 금강산 그림은 분신 같다. 금강산은 명승이지만 소정에게는 주변인으로 사는 감정이 이입된 소재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8년간 금강산을 사생했지만 금강산 소재의 작품을 활발하게 그린 건 50년대 후반이다. 사생한 시기로부터 20년을 경과한 시점이다. 국전에서 밀려난 소정은 주변인의 심정을 투사해 금강산에서 칩거하던 기억을 끄집어내 붓질하고 붓질하지 않았을까.

변관식 특유의 붓질인 적묵법(먹을 중첩)과 파선법(점을 찍어 선을 뭉갬)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그린 ‘금강산 구룡폭’(1960년대, 120×90㎝).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건희 컬렉션에는 금강산을 그린 ‘금강산 구룡폭’(1960년대)도 들어있다. 두 작품 모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서 볼 수 있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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