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뉴스룸에서

[뉴스룸에서] 퍼주거나 헐뜯거나

강창욱 국제부 차장


선거에 질까 안절부절못하며 갖가지 선심성 정책을 쏟아내는 대선 주자들을 볼 때마다 주인공의 총구나 칼날 앞에서 벌벌 떨며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는 악당을 떠올린다. 액션 영화의 클리셰이기도 한 이 모습은 정치판에서도 판에 박은 듯 반복되는 클리셰다. 언제나 나쁜 놈들은 우세할 때 괴롭히고 열세일 때 엎드린다(그래서 나쁜 놈이다). 주인공이 일말의 연민에 등을 돌리면 악당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야비한 얼굴로 뒤를 공격해 온다. 우리가 목격하는 정치판도 비슷하다. 정부와 여당은 지난 4월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고서야 민심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밀어붙이기와 자화자찬에 서슴없어진 태도를 보면 판세가 다시 자기들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집값 상승률이 다른 선진국 평균보다 낮다며 국민의 이해력을 탓한 이호승 청와대 정책실장의 말은 청와대의 변하지 않은 인식을 보여준다. 주말 내내 황당무계한 궤변으로 회자됐지만 동시에 이 실장의 태도가 너무 당당해서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나’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3기 신도시 사전청약 등을 앞세워 공급을 늘려보겠다는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며 대출을 조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당은 전세품귀 주범으로 꼽히는 임대차 3법을 신규 거래에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숨통을 트기보다 더 틀어막아서 가격을 눌러보겠다는 심산이지만 시장 반응은 심상치않다. 황교익씨는 경기관광공사 사장 자리를 포기하기로 했지만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내정은 몇 번을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와중에 여권 대선 주자들은 경쟁적으로 표심잡기용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에다 기본주택까지 통 크게 내걸자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군 전역자 사회출발자금(3000만원) 도입과 아동수당 확대, 저소득 청년 월세 지원을 약속하며 맞섰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유아·청소년에게 매년 500만원씩 적립해 스무 살이 되면 1억원을 주겠다고 공약했다. 김두관 민주당 의원은 신생아부터 3000만원을 지급하는 기본자산제 도입을 제시했다. 이들 정책의 수혜자가 주로 청년이라는 건 여당이 그들에게 가장 목을 매고 있다는 뜻이다.

상대 진영 후보에 대한 공세는 경쟁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싸움박질에 가깝다. 특히 ‘형수 욕설’ 논란부터 장애인 등에 대한 반말·욕설 폭로까지 이 지사에게 쏟아지는 공세는 이게 정치인들이 공론장에서 떠들 만한 얘기인지 귀를 의심할 정도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아내를 두고 꼬리를 무는 ‘쥴리 의혹’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권 주자들이 이토록 볼썽사나운 진흙탕 싸움을 하면서도 지지율이 떨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올라가는 것을 보면 서글픔이 앞선다. 우리에게 애초 썩 괜찮은 인물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선택의 족쇄를 찬 꼴이니 말이다.

우리는 정치인들의 민낯을 보며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들은 일반 시민의 괴로움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보통 사람이 정치판에 느끼는 대개의 괴로움은 이제 ‘정치란 이리도 막돼먹은 행위인가’가 아니라 ‘인간이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에 이르렀다. 정치라는 개별 영역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하는, 인간이라는 보편 대상에 실망하게 되는 일은 참담하다. 집값 폭등이나 ‘N포세대’ 양산이 정책 실패라면 인간성에 대한 절망은 정치 실패다.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림. 또는 그런 상태.’ 국어사전은 ‘절망’을 이렇게 해설한다.

강창욱 국제부 차장 kcw@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