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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우산을 씌워준다는 것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얼마 전 다시 봤다. 8월이기도 했고, 9월부터 방송될 허진호 감독의 첫 TV 드라마를 기다리는 팬심의 발로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인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주차 단속원 다림(심은하)은 비 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쓰면서 가까워진다. 맨입으로는 우산을 씌워주지 않겠다며 짐짓 새침하던 다림은 정원이 우산 속으로 들어오자 그가 비에 젖지 않도록 정원 쪽으로 우산을 기울인다. 정원은 이내 다림에게서 우산을 받아들고는 다림을 향해 우산을 돌린다. 다림을 자신에게 살짝 끌어당기면서.

영화에서 누군가에게 우산을 씌워준다는 건 이렇게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로맨틱한 장면으로 연출되곤 한다. ‘킹스맨’은 동네 건달들을 때려눕히는 무기로 우산을 창의적으로 활용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지난 27일 법무부 브리핑에서 강성국 차관의 수행비서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뻗어 올린 자세로 차관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이 포착됐고, 지나친 의전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부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까지 직접 우산을 든 무수한 국내외 정치인들이 온라인상에 소환됐다.

정치인의 손에 들리면 우산은 퍼포먼스의 소품이 되기도 한다. 2017년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과 캐나다 연합군 4000여명이 전사한 디에프 상륙작전의 희생 장병을 추모하는 연설을 하다가 갑자기 쓰고 있던 우산을 치우는 장면을 연출했다. 연설 내용은 이랬다. “지금 우리는 빗속에서 옷이 젖는 게 불편하다고 느끼지만, 그날은 비가 아니라 총탄이 쏟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우산으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2013년 미국을 방문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 야외 기자회견을 하다가 소나기가 오자 옆에 있던 해병대원들에게 우산을 씌워달라고 했다가 문제가 됐다. 해병대원이 제복을 입었을 때 우산 사용을 금지한다는 해병대의 규정을 무시하고 우산을 받치도록 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오바마 우산 스캔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국 가디언지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어떤 대통령이 자기 우산을 다른 사람에게 들게 한다는 건가?(But what kind of president has somebody else hold his umbrella?)’

법무부의 ‘우산 의전’은 차관의 사과로 일단락되는가 했는데 현장 영상이 공개되면서 다시 논란에 불이 붙었다. 차관이 브리핑 전에 자신이 쓰고 있던 우산을 직원에게 건네주고, 기자 중 누군가가 우산을 받쳐든 직원에게 ‘뒤로 가세요, 더 앉으세요’ 주문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기레기가 기레기했다’ ‘언론개혁! 언론중재법 통과!’라는 댓글이 우르르 달렸다.

그동안 일상에서 우산은 지하철이나 버스에 놓고 내렸을 때에야 존재감이 확인되는 기억력 감퇴의 상징일 때가 많았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면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신영복 선생의 말씀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분간 이어진다는 가을장마 동안 사람들은 우산을 볼 때마다 무릎 의전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 논란이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지 않으려면 기형적인 의전을 탄생시킨 뿌리 깊은 권위주의와 봉건적 위계질서를 반성하는 기회가 돼야 할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로 돌아가면, 영화에는 정원이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자연스럽게 노상방뇨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개봉 날짜를 확인했다. 1998년. 아, 그때는 그랬지. 머지않아 우산 의전 사진을 떠올리며 아, 그때는 그랬지, 하게 되기를 바란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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