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청사초롱

[청사초롱] 행복이라는 두려움과 용기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진리는 있는 법. 다들 입밖에 내길 두려워하는 그것은 바로 행복이란 매우 저렴하다는 것이다. 공짜로 행복을 얻을 수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소설 ‘인류를 사랑한 남자’에서 유달리 눈길을 끄는 문장이다. “내가 인류를 위해 하루 동안 한 일은 당신들이 평생 한 것보다 많소”라며 거창한 대의를 이야기하는 한 남자 앞에서, 오키프 양이 한 생각이다. 이 문장을 며칠 동안 생각했다.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으며, 지속적인 행복 속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고 말이다. 삶에는 이런 질문이 필요한 순간들이 때로는 찾아오는 것 같다.

인생이라는 게 매일의 일상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반복에 익숙해져 버린다. 이 반복이 행복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구속처럼 느껴지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딘가로 떠나고, 나아가야 할 것만 같다. 오늘 저녁이나 지난 주말에 보낸 일상이 인생에 주어진 모든 행복이라 믿을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이 일상이 행복의 전부라 생각할 수 없다. 이 다음, 삶의 어느 다음 단계에 더 진정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 행복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직이나 휴직을 하든지, 긴 연휴나 휴가가 있는 어떤 시절이 온다든지, 재테크에 성공해 아주 큰돈을 얻었을 때라든지, 근사한 집 한 채 갖게 되거나 아이가 다 컸을 때라든지, 그런 미래에 더 나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행복이란, 그렇게 무언가 더 얻거나, 더 나아 보이는 현실적인 조건에 속해야만 제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삶은 때때로 그렇게 더 나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끝없는 과정이고, 그에 헌신하고, 온몸과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이라는 것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저렴하게 지금 여기에서 누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해버린다면, 인생 전체를 부정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쉽사리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받아들이기가 두렵다.

어쩌면 내가 마음만 달리 먹었다면 어젯밤이, 지난주가, 지난 일 년이, 지난 십 년이 더 행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내가 어떤 용기만 냈더라면 사실 행복은 내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혹은 내가 마음의 어떤 태도를 명확히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내가 갈망하던 행복이 여기 주어져 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질문에 어쩐지 대답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삶을 얻기 위해서도, 행복을 얻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어쩌면 여기에서 ‘미인’이란 단지 과거의 가부장적 관념에서 ‘행복’을 상징하는 것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금 당장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다가서는 그 용기는, 다른 말로 오늘 여기에서 행복으로 다가서는 용기와 동일한 의미는 아닐까? 사실 나에게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은 갖춰져 있고, 단지 행복할 용기만 있으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저렴하고도 온전한, 진실하고도 충만한 행복이 어제 저녁에 주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녁 산책을 나서 공원에 내리는 비 오는 풍경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젖어 들어가는 밤에 작은 등을 켜놓고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시간을 좋아할 수 있었다면, 출근길에 만나는 나뭇잎 흔드는 바람을 조금 더 부드럽게 느낄 수 있었다면, 어느 한강변을 달리거나 아이와 물속에 뛰어들 수 있었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그 저렴한 행복을 받아들일 용기가 있었다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지금 여기의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용기만 있었다면.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