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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만만해진 ‘자유’


방역 위해 개인의 소중한 자유
기꺼이 양보해준 한국인
1년반 지속된 자유의 제한은
어떤 부작용을 낳았을까

‘호의 반복되면 권리인줄…’
영화 속 유명한 대사처럼
국가권력이 당연하다는 듯
언론·표현·집회의 자유를
침해하려 들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시작된 이후 “한국 사람들은 참 착하다”는 말을 주변의 한국 사람들에게서 자주 들었다. 우리가 우리를 ‘착하다’고 말하는 이 어색한 평가는 주로 서구의 방역 상황과 비교하는 과정에서 언급되곤 했다. 마스크를 거부하고 거리두기를 무시하는 행태, 그래서 정부가 “집에 있으라”며 봉쇄에 나서야 했던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방역의 풍경과 사뭇 달랐다.

한국 사람들은 당국의 주문을 아주 잘 따랐다. 마스크를 쓰라면 썼고, 모이지 말라면 약속을 취소했고, 명절에 부모님 댁을 찾지 말라면 전화만 드렸다. 가게를 닫으라면 닫았고, 카페에 앉지 말라면 커피를 들고 나왔으며, 사각형 테이블에 맞춰 네 명씩 밥을 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당국의 요구는 점점 세밀해져 이제 저녁엔 두 명씩 만나기, 러닝머신 속도를 시속 6㎞ 이하로 맞추기, 운동할 때 빠른 음악 틀지 않기, 폭염에 골프 친 뒤 샤워하지 않기 같은 것을 따르고 있다.

K방역은 이렇게 ‘착한’ 한국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좋게 말하면 ‘높은 시민의식을 가진 국민의 협조’인데, 달리 말하면 1년반이 넘도록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한 국민의 희생’을 토대로 이뤄진 것이다. 입을 막지 않고 숨 쉴 자유, 건강을 위해 운동할 자유, 친지와 밥 한 끼 먹을 자유, 잔뜩 땀 흘린 뒤 몸을 씻을 자유처럼 교도소에 갇힌 죄수가 아니라면 결코 제한되지 않을 많은 자유를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너그럽게 내주었다. 그렇게 침해된(방역을 위해 지불된) 자유의 값어치를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 계산해 논문을 쓴다면 천문학적 액수가 나오지 싶다. K방역은 매우 비싼 비용이 들어간 브랜드다.

우리와 방역 노선이 다른 영국은 ‘위드 코로나’ 실험을 하고 있다. 마스크를 벗고, 거리두기를 풀고, 축구장으로 공연장으로 몰려다닌다. 얼마 전 런던의 풍경을 취재한 뉴욕타임스 기사에 이런 제목이 붙어 있었다. ‘감염 증가에 당황하지 않는 영국인, 자유의 비용을 가늠하다.’ 방역 조치를 해제한 뒤 확진자가 부쩍 늘었는데, 영국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는 비용이라 여기며 일상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방역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한국인과 자유를 위해 방역을 희생하는 영국인. 이 차이에 옳고 그름의 잣대는 들이댈 수 없다. 그들과 우리가 다른 것이고, 각자 선택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K방역을 선전하는 정부는 순기능을 강조해 왔지만, 벌써 1년반이 넘었으니 역기능을 따져볼 때가 됐다. 방역을 위해 기꺼이 자유를 내준 우리는 어떤 부작용을 겪고 있는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역수칙의 변모 과정부터 짚어보자. 처음엔 ‘영업제한’ ‘집합금지’ 같은 용어가 사용됐다. 투박하게, 문 열지 말라, 모이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사적 모임’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5인 이상 금지를 창안해낸 서울시 입안자도 그냥 테이블 크기에 맞춘 이 규제가 과연 통할까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걸 국민이 따라주자 한 달 만에 중앙정부가 가져다 공식 수칙에 넣었다. 장소를 규제하던 간접적인 방법에서 벗어나 개인의 삶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국가는 갈수록 과감해졌다. 러닝머신 시속 6㎞, 헬스클럽 음악 120비트 같은 깨알 규제를 쏟아냈다. 그렇게라도 러닝머신을 이용하게 해주려는 친절한 정책이라 말하겠지만, 지나친 친절은 과도한 간섭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이토록 세세하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국가가 개인의 영역에 너무 깊숙이 들어온 행태다.

아주 정교해진 K방역의 진화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심스러움, 개인의 영역을 침범할 때의 주저함을 떨쳐내 온 과정이기도 했다. 자신감을 얻은 국가의 보폭은 넓었다. 한계에 몰린 자영업자들이 각자 차에 앉아 감염을 차단하며 목소리를 내려던 차량시위마저 불법으로 규정해 집회의 자유를 막았다. 국제사회가 의아해하는 대북전단 금지법을 강행하며 표현의 자유를 막았다. 여당은 지금 황당한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며 언론의 자유를 틀어막으려 하고 있다. 모두 국민이 방역을 위해 자유를 희생해준 학습 효과가 없었다면 엄두를 못 냈을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유’가 만만해진 것이다.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 대사처럼, 국민이 소중한 자유를 양보했더니 국가권력을 쥔 자들은 당연한 권리인 양 더 많은 자유를 침해하려 들고 있다. 착한 한국인이 자유를 되찾는 비용,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태원준 편집국 부국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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