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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환대의 영성

유장춘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괜찮다. 괜찮아.” 마태복음의 첫 부분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주 조용히 그 글자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이 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너도 함께 가자.” 두 번이나 남편을 잃고 시아버지에게서 씨를 받은 여인 다말에게도 주님은 괜찮다고 말씀하신다. 라합은 성벽 위에 주막을 열고 술 팔고, 웃음 팔고, 몸도 팔던 기생이었다. 그녀에게도 주님은 오라고 말씀하신다. 미망인이 돼 남의 나라에서 집도 절도 없이 방황하는 이방 여인 롯도, 심지어 남편을 전장에서 살해한 남자의 아이를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도 주님은 “그래… 고생 많았다. 이제 우리와 함께 살자”고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족보가 세상의 족보와 다른 이유는 이 이름들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족보에서 이 이름들이 빠져버리면 경주 김(金)씨나 전주 이(李)씨 족보와 다른 의미가 없어진다. 예수님의 계보에 담겨진 이 이름들은 가난하고 낮고 천한 그리고 무기력한 사람들, 부끄럽고 숨어버리고 싶은 사람들, 조용히 이름조차 드러내지 않고 존재 없이 사라져야 할 그런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 이런 이름들도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명예로운 가문에 당당하게 지위를 얻고 주인공이 되게 하셨다. 예수님의 세계(世系)는 바로 그런 세계(世界)다. 예수님은 그런 세상, 그 절대적인 은혜와 사랑의 세상을 우리에게 펼쳐주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심성은 복지사회의 바탕을 이룬다. 그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이고,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응답이며, 타자에 대한 수용이다. 선진사회로 갈수록 그 사회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없도록 섬세한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은 그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사회적 지표가 되고 있다. 선진사회에서는 인종, 빈곤, 성별, 장애 등으로 생겨난 소수집단을 위해 더 많은 재정을 투입하며 직업, 학업, 주거, 프로그램 등 더 많은 사회적 자원과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그들의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는 평등의 수준을 넘어 우대의 수준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특혜를 받아야 겨우 평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선진국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의심스러운 부분은 난민 또는 유민들에 대한 태도다. 우리나라는 아직 서구 사회의 난민 정책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아주 인색하게 소수의 난민들에게 ‘인도적 체류 허가’를 내주고 직장을 얻어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는 했지만, 우리 사회가 제공하는 적절한 문화 수준과 복지 혜택을 누리는 데는 제약이 많았다. 다행히 이번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어온 난민들에 대해서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그들은 대중적인 환영을 받고 있으며 ‘특별기여자’라는 새로운 개념의 지위를 부여받아 보다 개선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주도해야 할 사회적 역할은 예수님처럼 환대의 영성을 우리 사회 일반에 실현해 나가는 일이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눅 22: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낮은 자,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르게 살아야 하고 다르게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보다 많은 것을 가지려고 장벽을 쌓고 문턱을 높이는 이기적인 사회에서 장막을 열고 환영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교회는 다시 존경받는 지위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환대의 영성’이라는 책을 저술한 도러시 데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 조금 가난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제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조금씩만 덜 가지면 한 사람 몫이 더 나온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항상 한 사람 몫의 자리가 더 있었습니다.”

유장춘 한동대 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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