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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 in 이건희 컬렉션] 자식마저 등돌린 ‘외로운 선각자’… 붓끝엔 설움이 서렸다

(17) 나혜석의 ‘화령전 작약’

나혜석은 300점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현재 20여점이 겨우 전해진다. 그중 진위가 확실한 것은 10여점에 불과하다. 작업실에서 창작 의욕을 불태우던 나혜석의 모습.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나혜석(1896∼1948)은 20대부터 언론을 장식한 스타였다. 그는 한국 근대기 최초로 서양화를 전공한 여성 화가였다. 일본 도쿄여자미술학교(현 조시비여자미술대학) 시절에는 소설 ‘경희’ 등을 발표해 김명순과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자리를 다투며 문필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를 대중매체 스타로 만든 건 10년 연상의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하면서 신혼여행길에 죽은 옛 애인 묘소를 찾은 사건이었다. 상처한 김우영의 6년 구애를 받아들이며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해줄 것, 전실 딸과 시어머니와 별거할 것 등 결혼서약서를 쓰게 한 일도 가십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결혼이라는 현실적 제약도 수원 부잣집 딸 나혜석의 그림 열정을 꺾지 못했다. 결혼 이듬해인 1921년 만삭의 몸으로 경성에서 여성 서양화가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70점의 유화를 선보인 전시회는 화제 몰이를 했다.

22년 조선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가 출범한 이래 야심 찬 그 시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혜석도 꾸준히 공모전에 도전했다. 1회부터 11회(1932년)까지 총 18점을 출품해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다. 1927∼29년에는 여성 최초로 구미 여행을 다녀온 후 귀국전을 가졌고, 이혼 후에도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며 35년 소품 200여점을 갖고 개인전을 했다. 그렇게 생전 300점 이상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많은 작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현존하는 작품은 20여점, 이 가운데 출처가 확실한 것은 수원시립미술관 소장 ‘나부’ ‘김우영 초상’ ‘염노장’ 등 10여점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화령전(畵寧殿) 작약’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에 소개되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됐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된 '화령전 작약'(1930년대, 패널에 유채, 33.7×24.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장에 걸린 ‘화령전 작약’은 말년 나혜석의 처지처럼 외로워 보인다. 여자 후배였던 백남순의 ‘낙원’이 가로 3.7m짜리 엄청난 대작이라 그 옆에 걸린 A4용지 크기의 ‘화녕전 작약’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백남순은 최초의 파리 유학 여성 화가였지만 근대사가 낳은 개인적 비극으로 미국으로 이민 가면서 잊힌 화가가 됐다. 하지만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이 대작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재조명의 기회를 얻게 됐다.

화가의 예술세계는 결국 남아 있는 그림이 말한다. 나혜석의 경우 소설 수필 등 문필가로서 족적은 잡지에 발표한 글로 증거된다. 생전에 발표한 유화 작품의 미확인 혹은 부재는 화가 나혜석을 조명하는 데 치명적인 약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불행의 씨앗은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를 남긴 1927∼29년의 구미여행이다. 김우영은 23년 만주 안동현 부영사가 됐고, 임기가 끝나자 일본 외무성은 벽지 근무를 마친 그에게 위로 출장 명목으로 구미 시찰 여행을 보내줬다. 아내 나혜석이 여기 동행한 것이다.

구미 여행 중 남편을 그린 '김우영 초상'(1928년, 캔버스에 유채, 54×45.5㎝). 수원시립미술관 제공

젖먹이를 포함해 어린 세 자녀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구미 여행길에 오른 나혜석은 화가로서 야망에 부풀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미술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영감을 얻고 자극을 받았다. 특히 8개월을 체류한 파리에선 비시에르라는 화가가 지도하는 미술연구소에서 야수파와 입체파를 새롭게 접했다. 하지만 그곳 파리는 독립운동가였으나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과 불륜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귀국 이후 나혜석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귀국 후 불륜을 고백했고 1930년 이혼을 통보받았다.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줄줄이 아이를 둔 어미였던 그는 34년 최린을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고 그 유명한 ‘이혼고백서’를 잡지 삼천리에 기고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소설을 통해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인 나혜석은 그렇게 한국여성운동의 선구자가 됐다.

화가로서 삶은 어떠했을까. 불륜과 이혼이 소문나며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31년 일본 문부성 주최 도쿄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 파리 풍경을 담은 ‘정원’이 특선하며 재기하는 듯했다. 사진기자들이 밤중에 자택에 들이닥치며 다시 서울의 화젯거리가 됐다.

제전 특선은 이전까지의 조선미전 출품작에 대해 혹평하던 평론가들을 한 방 먹이는 의미도 있었다. 안석주는 “나혜석의 작품에서 백남순보다 신선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했고 김기진은 “안정감 실재감이 부족하고 데생의 오류와 작업에 진척이 없다”고 지적한 적도 있다.

‘화령전 작약’은 나혜석이 이혼 후 고향 수원에 내려와 있으면서 정조의 사당인 화령전과 그 앞에 핀 작약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화령전 기와지붕과 붉은색 대문이 크게 후경을 차지하고 화면의 앞면 절반에는 활짝 핀 작약이 날아갈 듯한 필치로 표현돼 있다. 빨강과 초록의 강렬한 대비, 속도감 있는 필체는 화면에 생기를 부여한다. 이 그림은 확실히 전작과 다르다. 조선미전 도록 속 흑백 그림으로만 남아 있지만, ‘묘사’에 충실했던 초기작에 비해 이 그림에선 거칠고 주관적인 ‘표현’이 강조됐다. 불안 분노 욕망이 붓질에 요동친다. 조카 나영균은 나혜석이 32년부터 수전증을 앓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붓질에는 그런 영향도 있을 것이다.

나혜석은 32년 다시 도쿄 제전에 도전하기 위해 금강산에 들어가 30여점의 유화를 그렸다. 하지만 숙식을 해결하던 집에 불이나 작품 태반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다. 33년엔 서울에 여성미술가를 양성하기 위한 사설 학원을 개설했지만 실패했다. 35년 소품 200여점을 발표했지만 더는 주목받지 못했다. 이후 그는 화가로서도 문필가로서도 공식 무대에서 사라졌다. 52세였던 48년에 행려병자 신세가 돼 세상을 떠났다.

“에미는 선각자였으니라”고 했지만 자녀들은 에미를 부정했다. 막내 김건은 한국은행 총재 시절 기자의 질문에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식들에게까지 각인된 ‘나쁜 여자’는 한국 사회가 덧씌운 이미지다. 그 많은 그림은 나쁜 여자 이미지에 익사한 걸까. ‘화령전 작약’은 심연에 가라앉은 예술의 존재를 안타깝게 알리는 부표 같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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