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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욱의 슬기로운 금융] 파월 “연내 테이퍼링 가능” 잭슨홀 연설… 속으론 ‘시작이 반’?


코로나19의 어려운 시국에서 값비싼 운동인 골프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비용 때문에 망설이던 사람들도 지인이 선물한 골프채가 계기가 돼 입문하곤 한다. 시작이 반이라고, 사람들은 기왕에 시작된 골프에 수렁처럼 빠져들어 간다. 일단 시작하면 쉽게 빨려 들어가는 것은 골프만이 아니다. 최근 세계 금융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테이퍼링(tapering·돈줄 서서히 죄기)과 관련된 논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작년 초 들이닥친 코로나 사태에 대항해 각국은 엄청난 돈을 풀며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이제 사람들은 풍부해진 유동성을 당연한 듯 여기고 있다. 일단 시작된 유동성 파티에 빠져 이 잔치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유동성을 책임지는 중앙은행으로서는 이 상황을 조용히 끝내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고 느낀다. 유동성을 더 즐기고픈 시장과 파티 테이블을 치우고픈 중앙은행 간의 신경전이 팽팽하다. 다만 이 갈등을 세계의 중앙은행이라는 미국 중앙은행(연방준비제도, 약칭 연준)과 시장의 문제로 볼 필요가 있다. 미 연준의 정책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모든 국가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연준은 코로나 사태로 무너져 내리는 미국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금리를 전격적으로 0%대로 낮췄다. 그러고도 모자라 매월 1200억 달러(약 140조원)의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 덕분인지 미국의 경기는 역동적으로 살아나고 있다. 지난해 3.4%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은 올 2분기에 6.5%로 반등했고, 소비자물가도 7월에 5.4%까지 튀어 올랐다.

이 정도라면 연준이 돈줄을 서서히 죌 만도 한데, 그럴 마음이 없다는 사인을 연신 보내고 있다. 연준의 속마음이 정책 전환의 부작용에 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로 연준이 찍어낸 돈은 물경 2조 달러에 달하지만, 미국 사람들이 은행에 예금한 돈만 그 10배에 이른다. 주식 등에 운용 중인 돈까지 합치면 수천 배가 넘을 것이다. 섣불리 테이퍼링을 시작했다가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이 한쪽으로 쏠린다면 경제가 다시 좌초할 수도 있다.

과거 글로벌 금융 위기 극복 과정이던 2013년에 겪었던 긴축발작(taper tantrum)이 대표적인 예다. 그저 테이퍼링을 시사만 했을 뿐인데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을 쳤다. 이에 연준은 정책 결정 방식을 바꾼다. 그간 연준은 통화정책이 실제 경제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6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정책은 항상 ‘선제적으로(preemptive)’ 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전대미문의 상황에서 시장 예상으로부터 벗어난 깜짝 정책은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결국 2014년 연준은 금과옥조처럼 여겨오던 선제적 정책 대신 ‘경제지표에 유의해(data-dependent)’ 정책을 펴겠다고 스탠스를 바꿨다. 그러고는 물가와 고용지표를 중심으로 세밀한 분석을 내놓는다. 연준은 시장과 소통하고 시장을 설득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장은 연준의 분명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한다. 제롬 파월 의장을 비롯한 연준 이사들의 목소리가 저마다 다르니, 연준의 속마음을 종잡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에 연준은 연준대로 시장의 경기 판단과 테이퍼링에 대한 반응이 궁금하다. 긴축발작의 악몽을 떠올려 보면, 정책 전환에 대한 시장의 수용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연준과 시장이 서로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잭슨홀 미팅이 다가왔다. 매년 8월 말 시행되는 이 행사에선 전통적으로 연준의 중요한 정책 방향이 제시되는 만큼, 시장의 이목이 쏠리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행사를 불과 1주일 앞두고 금융시장의 대표 격인 골드만삭스가 보고서를 발표했다.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테이퍼링이 올해 11월 이후에 실시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다른 투자은행들도 비슷한 시각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연준으로선 반가웠다. 시장이 테이퍼링을 받아들였다고 해석한 것이다. 연말쯤 테이퍼링을 시작해도 시장이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하게 된 파월 의장은 잭슨홀 미팅 연설에서 두 가지를 분명하게 밝혔다. 첫째, 올해 테이퍼링이 시작될 수 있다. 둘째, 테이퍼링과 금리 인상은 별개다. 비유컨대 이제 돈을 푸는 수도꼭지는 서서히 잠그겠지만, 돈이 잠겨 있는 욕조의 물은 당장 빼지 않겠다는 것이다. 돈 잔치가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에 시장도 만족해 했다.

모두가 행복한 듯 보이지만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 있다. 연준의 정책 추진 패턴이다. 처음 정책 기조를 전환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지만,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거침이 없다. 과거 연준의 정책금리 추이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정책금리가 내려갈 때는 폭포수와 같고, 올라갈 때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연준은 이번 잭슨홀 미팅에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속삭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일단 정책 전환의 물꼬인 테이퍼링에 대한 시장의 수용성을 확보하는 데 최대한 집중하자고, 그다음은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말이다.

연준의 이런 속삭임은 미국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를 겪은 것도 1994년 연준의 금리 인상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니, 우리로서도 연준의 조치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물론 본격적인 금리 인상까지는 유동성 파티가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이후 짧지만 굵었던 돈 잔치의 흐름은 바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유동성에 기댄 투자 전략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배어버린 타성을 벗어던질 지혜와 결단의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안희욱 한국은행 자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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