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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부채에 대한 정부의 이중잣대

이종선 경제부 기자


‘빚’이라는 본질은 같은데 가계부채와 국가채무를 대하는 정부의 태도는 180도 다른 것 같다. 가계부채에 대해 정부는 최근 고승범 금융위원장 등판을 계기로 거의 전면전에 나서고 있다. 금융위원장이 연일 금융감독원장, 한국은행 총재와 만나 전투 의지를 다졌고, 겁먹은 은행들이 앞다퉈 그동안 해오던 각종 대출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매일같이 매스컴을 탄다. 정부의 기습적인 대출 차단에 대출을 기다리는 실수요자의 곡소리가 나왔지만, 정부는 마치 “가계부채를 잡겠다는 대의(大義) 앞에 일부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비장하게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국가 재정건전성을 책임지는 기획재정부에는 가계부채 문제를 대하는 금융위 같은 결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작년 10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을 60% 이내로 관리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국형 재정준칙’을 발표했다. 이 재정준칙을 담은 국가재정법 개정안이 1년 가까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데 홍 부총리가 이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설득하러 다닌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대신 기재부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해서는 재정을 적극적으로 쓸 수밖에 없고 국가채무 증가도 불가피하다”며 합리화에 열심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부 내에 가계부채는 ‘나쁜 빚’이고 국가채무는 ‘좋은 빚’이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집권당은 한술 더 떠 대놓고 이런 생각을 드러냈다. 여당 원내사령탑을 지냈던 한 중진 의원은 지난 6월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최근 국가채무 증가 폭이 가계부채 증가 폭보다 작다고 정부를 질타하면서 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지급을 주장했다.

유례없는 초저금리와 부동산 가격 폭등에 따라 급증한 가계부채를 정부가 방치할 수 없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가계부채는 잡겠다면서 국가채무는 내버려 두거나 오히려 늘리지 못해 안달 내는 이중적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갑작스러운 외부 충격에 취약점이 될 수 있다는 정부의 가계부채 대응 근거는 국가채무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미국의 가계부채에서 시작된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직격탄을 먼저 맞은 건 그리스 등 채무가 많고 재정이 방만한 남유럽 국가였다.

가계부채가 2016년 말 1344조원에서 지난 6월 1806조원으로 34.4%(462조원) 증가한 반면 국가채무는 2017년 660조원에서 내년 1068조원으로 61.8%(408조원) 늘어날 전망이다. 대상 기간이 정확히 같지는 않지만, 국가채무 증가가 가계부채 문제에 비해 가볍게 취급받을 사안은 아님이 분명하다.

가계부채는 대부분 장사가 안돼 형편이 어려워진 자영업자가 생계를 위해 돈을 꾸고, 치솟은 전셋값을 어떻게든 충당하거나 내 집 마련 막차라도 타려는 사람들이 돈을 빌린 결과물이다. 이와 달리 국가채무는 대통령이나 집권 세력, 정부 고위 관료 등 힘센 사람들의 결정이 초래한다. 가계부채 잡겠다며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국가채무 문제는 눈 감는 행태는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가계부채야 사실 정부가 마음먹고 은행 팔을 비틀면 증가세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채무는 그렇지 않다. 당장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여야 유력 후보들이 내놓은 각종 정책 구상이나 공약들을 보자. 지출은 크고 효과는 장담 못할 선심성 공약들이 넘쳐난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하면 허리띠부터 졸라매겠다”고 약속하는 후보가 과연 나올까 싶다. 내년 5월 누가 청와대에 입성하든 당분간 ‘국가채무 다이어트’에 돌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에 속하는 고령화와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산은 또 어떤가. 고령화로 복지 지출은 갈수록 늘고, 저출산으로 경제활동인구가 줄면 재정 기반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나 고위 공무원들이 이런 구조적 문제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중요한 건 당장 다음 선거이거나 밥줄일 뿐, 국가의 미래가 아니다.

이종선 경제부 기자 remember@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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