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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 잔혹 사회, 분노의 품격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 그는 20개월 영아를 폭행해 숨지게 했다. 아이가 살아있을 때 성폭행한 흔적도 나왔다. 20대인 그는 아이의 의붓아빠였다.

# “잔소리하고 심부름을 시켜서 짜증이 났다.” 부모 대신 자신들을 키워준 70대 친할머니를 칼로 찔러 숨지게 한 18살 손자가 진술했다. 범행엔 16살 남동생도 가담했다.

#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이 여성은 결국 숨졌다. 그가 그 여성을 그렇게까지 때린 이유는 ‘자신과의 관계를 주위에 알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둘은 연인관계였다.

끔찍한 일들이 최근 1~2주 사이 연속해 벌어졌다. 한국 사회가 갑자기 잔인해진 건 아닐 터다. 이들 사건은 일종의 예에 가깝다. 단순히 강력범죄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사건이 점점 더 자주, 더 심한 형태로 발생하고 있다.

강력범죄는 아니지만, 숨겨진 잔혹함에 진저리가 처지는 사건들도 숱했다. 길가에서 할머니가 담배 심부름을 거절하자 꽃으로 머리를 때리고 그런 모습을 촬영하며 조롱한 고등학생들, 길고양이를 끔찍하게 학대해 인증하고 다른 한편에선 그것을 응원하며 조장한 패륜 커뮤니티 등의 기사를 처리하다 ‘진짜 한국에서 벌어진 일 맞나’ 되묻게 되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갈수록 세지는 사건의 강도에 익숙해질 틈이 없다. 용인할 수 있는, 혹은 견딜 수 있는 잔인함이나 끔찍함의 상한이 사라져버린 듯한 사회에서 우린 끊임없이 분노한다. 최근 ‘공분’이라는 단어가 빠진 기사가 몇 건이나 됐을까. 극악 범죄를 저지른 이를 댓글로 욕하며 비난하고, 신상을 털고, 엄벌을 처하라 청원을 넣고, 때론 시위에 나선다. 20개월 영아 성폭행·살해 사건의 경우 연예인부터 대선 주자까지 각계 각층이 대거 나섰다. 한 대선 주자는 사형제 부활을 강조했고, 물리적 거세를 하자는 주장마저 나온다.

잔혹함에 대해 사람이 보이는 일차적 반응은 분노라고 한다. 글로만 봐도 신경이 곤두서고 불쾌해지는 일들에 일단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방어기제인 셈이다. 잔혹함이 매번 갱신되는데, 분노 수준이 따라 커지는 것도 막을 길은 없다. 실제 사회적 분노가 하나로 모일 때 그 힘은 폭발적이다. ‘n번방 사건’을 향한 사회적 분노가 법·제도 개선으로까지 이어진 건 한 예다.

다만 분노는 원초적 반응이자 부정적 감정에서 비롯된 힘이다. 결코 섬세하지 않고 폭발적이다. 더구나 분노를 터뜨리는 건 너무나 쉬워졌다. 휴대폰 하나만 잡고 있으면 누구나 댓글로, 청원으로 분노를 표하고 퍼뜨리고 공감할 수 있다. 때문에 사건 내용을 미처 제대로 알아보거나, 명확히 판단해볼 필요성이나 시간을 채 갖기도 전에 분노가 먼저 폭발해버린다.

두려운 건 분노할 대상이 잔혹해질수록 그들을 악마화하는 것도 점점 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잔혹함을 악마화하는 건 일종의 ‘구분’이다. 악마화된 저들을 향해 함께 욕하고 분노하면 우리 편으로 구분된다. 함께 분노하지 않거나, 다른 질문을 던지면 악마의 편으로 매도될 수 있다. 무엇보다 악마화된 저들을 몰아세우고 분노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의 편에 섰다는 착각을 안겨준다. 심리철학자 애덤 모턴은 ‘잔혹함에 대하여’에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이를 괴물 취급하며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오히려 잔혹함이 반복될 여지를 주게 된다”고 썼다.

잔혹의 시대, 우리는 혹시 분노라는 값을 치러 잔혹함을 그저 소비하고 있진 않은가. 더 많이 분노한다고 더 정의로워지는 게 아니라면, 쉬운 분노 대신 진짜 답을 찾기 위해 지혜를 모으는 품격을 찾을 순 없을까.

조민영 온라인뉴스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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