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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 ‘거의 비미국적인’

전웅빈 특파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달부터 시행하는 텍사스주 낙태법을 비판하며 이런 표현을 썼다. “거의 비미국적(almost un-American)”. 텍사스에서는 이제 강간이나 근친 성폭력 피해를 당해 임신해도 6주가 지나면 낙태가 금지된다. 법은 낙태를 도운 사람까지 처벌하고, 그 신고를 시민이 하게 했다. 낙태하려는 여성을 병원에 데려다준 우버 운전사까지 처벌받을 수 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침해했고, 헌법에 어긋나며, 시민을 자경단으로 만들어 분열을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바이든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나라를 미국답지 않다고 한 것이다.

바이든은 사실 이전에도 ‘un-American’ 표현을 꽤 자주 사용했다. 지난달에는 올 초 발생한 의회의사당 난동 사건을 위헌적이라 비난하며 이 표현을 썼다. 백악관이 모아 둔 대통령 연설과 성명을 분석해봤더니 취임 이후에만 열일곱 차례 ‘un-American’을 언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특정 이슈를 놓고 “미국답지 않다”는 비판을 쏟아내 왔던 셈이다.

인종 차별을 비판할 때 여덟 번으로 가장 많았다. 바이든은 취임 엿새째 되는 날 인종 불평등 해소를 위한 행정명령 4건에 서명하며 “외국인 혐오증 부활에 맞서 싸울 것을 연방기관에 지시했다. 용납할 수 없고 비미국적”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아시아계 증오범죄를 언급하며 “그들은 미국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생명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한다. 틀렸고, 비미국적”이라고 했다. 유대인 대상 증오범죄 사건 발생(5월 28일), 털사 대학살 100주기 추모(6월 1일) 때도 인종차별이 비미국적이라고 말했다.

성소수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언급하면서 이를 ‘비미국적’이라고 표현한 적도 두 번 있었다. 지난 6월 성소수자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내가 본 것 중 가장 추악하고 비미국적인 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포함하면 혐오와 차별 사안에서 ‘un-American’ 표현을 사용한 게 열 번이다. 바이든은 공화당의 투표권 제한법을 비판하면서 다섯 번 이 표현을 썼다. 투표권 제한 역시 이민자나 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의 투표 참여를 어렵게 하려는 것이어서 차별에 대한 비판과 어느 정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결국 ‘혐오를 조장하고 평등을 억압하며 자유를 침해해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에 바이든은 ‘un-American’ 스티커를 붙여왔던 셈이다. 그의 표현에선 “미국은 본래 자유와 평등, 인권 존중, 민주주의 가치 실현을 충실히 해왔다”는 뉘앙스마저 읽힌다. 한 국가가 인류 보편의 가치 추구를 정체성이나 존립 이유로 정한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러나 바이든의 레토릭은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걸 방증하는 수사이기도 하다. 비판이 잦았다는 건 그만큼 ‘미국답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 많이 있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브레넌정의센터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지난 7월 중순까지 18개 주가 투표권을 제한하는 30개 법률을 새로 만들었다. 연방수사국(FBI)에 따르면 지난해 증오범죄는 7759건으로 12년 만에 가장 많았다.

아프가니스탄 철군 과정에서 보인 추태는 창피한데, 그래도 철군 자체는 국익을 위한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답다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아프간 철군은 어찌 보면 가장 미국다운 선택일 수 있겠다. 억압받는 아프간 여성과 소녀들의 이야기가 연일 들리고 있다. ‘무섭다. 살려달라’는 조력자들 목소리도 매일 소개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비미국적인 일 때문에 생긴 게 아니다. 인류 보편의 가치에서 멀어지고 있는 미국이 있을 뿐이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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