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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어내고 메우고… 시간과 노동으로 탄생한 만개의 격자

‘단색화 거장’ 정상화 개인전
격자화 완성에 수개월서 1년 소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6일까지

정상화 작가의 대표작인 ‘무제 12-5-13’, 2012, 캔버스에 아크릴릭, 259.1x193.9㎝. 작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단색화의 거장인 정상화(89) 작가의 개인전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막바지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정상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격자 그림’을 집중조명하면서 이 그림 탄생 이전과 이후의 변주를 폭넓게 보여준다.

작품을 보면 캔버스 화면 위에 1만개는 돼 보이는 손톱 크기 물감층이 칩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바둑판처럼 반듯한 게 아니라 삐뚤빼뚤해 자연의 맛이 있다. 벼를 베어낸 겨울 논을 드론으로 찍는다면 비슷한 풍광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선 서구의 기하학적 추상과 다른 자연미가 있다. 작품들은 ‘노동’ ‘수행’ ‘경작’에 비유될 만큼 오랜 시간과 노동의 결과로 탄생한다. 200호 300호 대작이 탄생하려면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이런 작업 과정, 흰색과 청색 등 단색 톤 때문에 그는 단색화 작가로 분류된다. 단색화 작가는 1970년대 후반 들어 한국에서 태동한 집단적인 추상미술 경향을 말한다. 색에 있어 흰색을 비롯한 중성색, 형식에서 반복적이고 수행적인 작업을 특징으로 한다. 단색화는 2012년 이후 세계 미술계에서 주목받았다. 작가 생존 시 작품 가격이 10억원이 넘는 작가군인 ‘10억원 클럽’에 단색화 작가인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작가가 포함됐다.

단색화는 1975년 일본 도쿄의 도쿄화랑에서 이우환 작가가 중개해 열린 ‘한국 5인의 작가: 다섯 가지의 흰색’전이 시발점이 됐다. 이후 국내 기반의 작가를 중심으로 단색화 흐름이 형성됐다. 그런데 정상화는 국외에서 홀로 작업하면서도 단색화라는 동시대 집단적인 흐름에 수렴됐다는 점이 놀랍다.

정상화는 말년에 뉴욕에 정착한 김환기 못지않은 노매드(유목민) 작가였다. 그는 57년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그 시대 대학을 갓 졸업한, 전후의 피 끓는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뜨거운 추상’이라 불리는 비정형 추상화인 앵포르멜을 했다.

정상화 작가는 40대부터 60대까지 20여년간 한국을 떠나 일본 고베와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면서 자신의 아이콘이 된 격자화를 창안하고 완성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67년 프랑스로 가서 1년간 지내고 귀국한 뒤, 69년부터 77년까지 일본 고베에서 활동했다. 77년부터 92년까지 다시 프랑스에 체류하는 등 고베와 파리에서 보낸 23년 동안 ‘격자화’가 탄생하고 완성됐다.

작업 방식은 특이하다. 캔버스 윗면 전체에 붓을 사용해 고령토를 덮어 바르기를 일주일 이상 반복한다. 고령토가 마르면 캔버스 뒷면에 자로 바둑판처럼 그어놓은 수직선과 수평선, 혹은 사선의 결대로 캔버스를 접어서 고령토를 똑똑 분질러 떼어 낸다. 그렇게 해서 한 칸 한 칸 비어진 공간을 물감을 겹겹이 바르며 채우는 식으로 해서 완성된다. 이런 격자화는 73~74년 무렵 처음 나타난다. 단색화의 진원이라고 하는 도쿄화랑 전시가 일어난 75년보다 빠르다. 초기에는 흰색을 즐겨 썼다. 후반부엔 파란색 옻칠 색 등으로 색이 다양해졌다.

작가는 자신의 흰색에 대해 “순정한 흰색이 아니라 때 묻은 삼베 같은 흰색, 부뚜막 밥 짓는 연기 같은 흰색”이라고 강조한다. 파란색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를 마산에서 보냈다. 전쟁통에 학교가 야전병원으로 쓰여 수업을 바닷가에서 했다”며 “이 파란색은 그때 보았던 마산 바다의 색”이라고 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 위에 천을 올려놓고 문지르는 기법으로 완성한 대작들도 나왔다. 세간에 덜 알려진 이 기법의 작품은 별도의 방으로 꾸며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도쿄현대미술관, 구겐하임 아부다비 등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다. 26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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