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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무대는 바로 여기, 주인공은 바로 우리

최여정 문화평론가


어둠이 내려앉는 밤거리,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재즈 선율을 따라 방돔 광장의 고풍스러운 가로등이 하나둘 붉을 밝힌다. 센 강의 물결도 벨벳을 펼쳐놓은 듯 출렁인다. 어둠이 조금은 외로워지는 익명의 시간, 좁은 골목을 스치며 오가는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 검은 실루엣의 에펠탑 위로 별빛이 쏟아지듯 아름다운 조명이 신기루처럼 명멸하면 손을 잡고 거리를 걷던 연인들은 발걸음을 멈춰 깊은 키스를 나누고, 아빠의 어깨 위에 목마를 탄 금발의 소녀는 그 불빛을 향해 손을 뻗는다. 수천년간 이 도시에 나타났다가 스러진 인간의 꿈과 욕망, 지금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후회의 탄식이 들려온다.

“파리라는 멋진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하나는 아무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태어나고, 살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이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근대사회의 상징적 공간인 파리를 무대로 다양한 인간군상의 추악한 본성을 보여준다. 가난한 귀족 출신의 법학도 청년 라스티냐크는 일찌감치 깨닫는다. 착실하게 학위를 받고 일을 하는 것보다는 세속적 불빛으로 가득한 사교계 진출이 성공의 지름길임을. 그리고 자신의 하숙집 옆방에 사는 고리오 영감의 부유한 딸들에게 접근하지만 그녀들의 물질적 집착과 속물스러운 탐욕만 발견하게 된다. 결국 딸들에게 버림받고 혼자 비참한 죽음을 맞은 고리오 영감을 묻은 뒤 라스티냐크는 파리를 내려다보며 외친다. “자 이제 파리와 나, 우리 둘의 대결이다.”

‘고리오 영감’은 19세기 산업 발전과 자본주의 등장, 그 욕망으로 들끓는 도시 속에서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이야기한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 거주자는 세계 인구의 3%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절반 이상인 약 33억명이 도시에 산다. ‘도시의 탄생’을 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 P D 스미스는 2050년이 되면 도시 인구는 75%까지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도시는 인간이 상상하고 꿈꾸는 세계를 벽돌, 강철, 콘크리트, 유리로 구체화한 가장 위대한 창조물이다. 그래서 인류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며 살아가고 도시를 건설하는 존재, 즉 ‘호모 우르바누스(Homo Urbanus)’라고 저자는 말한다.

최초의 도시는 기원전 2000년쯤 수메르인들에 의해 건설됐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남쪽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비옥한 땅에 터를 잡고 삶을 꾸려나갔다. 인류는 자연이 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환경을 만들며 살아남았다. 왜 유목하던 인간은 정착하여 도시를 만들었을까. 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그의 책 ‘장소와 정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장소란 ‘이동 중 정지(pause in movement)’ 하는 곳이고, 인류를 포함한 대다수의 동물이 어떤 지점에서 멈추는 경우는 그곳이 바로 모종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정지로 인해 그 장소는 우리가 느끼는 ‘가치의 중심지’가 된다. 인간은 그곳에 도시를 만들고 함께 살아나간다.

메가시티,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연극 ‘천만개의 도시’는 시민들의 삶을 47개의 장면으로 나열한다. 손에 커피 한잔을 들고 꽉 들어찬 엘리베이터로 몸을 구겨 들어가는 회사원들, 공사 소음으로 투덜거리는 신혼부부, 여행을 꿈꾸는 여자. 아침에 눈을 떠서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그저 무심코 스쳐 지나가는지. 연극은 그렇게 지나쳐가는 얼굴 하나하나를 돌아보게 한다. 광화문광장에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는 반가움.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어깨를 마주하고 앉은 회사원들의 뒷모습에서 지친 하루를 격려하는 따뜻한 목소리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걸어가는 여대생들에게서는 설레는 사랑 이야기가 들려온다. 무대는 바로 여기, 주인공은 바로 우리. 도시의 밤이 저물고, 하루가 지나가고, 이곳에서, 이 삶을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기적 같다.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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