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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 징계권

박정순 굿네이버스 사업운영본부장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 방식을 심어주는 훈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훈육의 리스트에 폭력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매란 없다.’ 지난해 9월 울산지방법원은 5살 자녀를 때려 숨지게 한 계부에 대해 징역 12년의 중형을 선고하면서 7쪽에 달하는 장문의 양형 이유를 이례적으로 판결문에 담았다. 이는 ‘사랑의 매’를 핑계로 자녀에 대한 체벌을 일삼는 부모들을 향한 재판부의 당부이자 호소였다.

2019년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우리나라 정부에 훈육적 체벌을 포함한 모든 체벌을 명시적으로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 체벌은 곧 아동의 권리를 침해하고 존엄성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 아동복지법 제5조에도 ‘아동의 보호자는 아동에게 신체적 고통이나 폭언 등의 정신적 고통을 가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수년간 자녀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어졌다. 민법 915조에 명시된 ‘자녀 징계권’ 때문이었다. 이 법 조항으로 인해 부모가 자녀를 체벌하는 것이 부모의 권리로 여겨지거나, 체벌로 자녀를 훈육할 수 있다고 오인돼 아동학대 행위자의 면책 항변 사유로 악용되기도 했다.

지난 1월 8일 민법 915조 자녀 징계권 조항이 폐지됐다. 지난해 8월 정부는 ‘제2차 아동정책 기본계획’에서 징계권이라는 용어가 체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을 근거로 민법 915조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비로소 63년 만에 징계권이 삭제된 것이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정부와 국회가 징계권 삭제에 동의한 것은 체벌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체벌을 정당화하는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하는 이유가 컸을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시민사회 주도로 징계권 삭제 논의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2019년부터 굿네이버스를 비롯한 민간단체들은 민법 915조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Change 915.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캠페인을 진행했다. 시민들의 지지 서명을 받았고 토론회, 기자회견, 성명서 발표 등을 통해 민법 915조의 실질적인 법 개정을 촉구했다.

징계권의 삭제는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는 시작일 뿐이다. 이제라도 부모를 포함한 양육자가 가정에서 체벌하지 않고 어떻게 긍정적으로 아동을 양육할 수 있는지, 아동의 건강한 발달을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지 정부와 시민사회, 양육자들의 적극적인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9월 15일. 징계권 조항 삭제를 외치며 ‘Change 915’ 캠페인을 시작한 지 3년째 된 날이다. 민법 안의 ‘징계권’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의 인식 속에 ‘징계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때다. 아동학대와 체벌 근절을 위해 법과 제도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이 사회적 관심이다.

박정순 굿네이버스 사업운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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