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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밥상+머리] 아욱국의 덕목


‘시골에 살면서 과수원이나 남새밭을 가꾸지 않는다면 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일렀다. 일전에 자신은 바쁜 가운데서도 만송 열 그루와 전나무 한두 그루를 심었음을 상기시키며, 만약 자신이 지금도 집에 있었다면 온갖 나무들이 밭을 이루었을 거라고 길게 덧붙였다. 아버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남새밭 가꾸는 법을 알려준다. 자상하지만 꼬장꼬장 잔소리가 대단하신 아버지다. 내년 봄에는 나도 시에서 분양하는 도시텃밭 한 구획 얻어 소소한 경작 체험이라도 해보고 싶어, 남의 가족 편지일지언정 눈여겨본다.

아버지는 무엇을 심어야 할지도 소상하게 일러준다. 우선 아욱 한 이랑, 배추 한 이랑, 무 한 이랑씩. 가지나 고추 등속도 따로따로 구별해 심어놓으라 조언한다. 마늘이나 파도 빼놓지 않는다. 추가로 미나리도 심을 만하고, 한여름 농사로는 참외도 추천. 생지황, 끼무릇, 도라지, 천궁, 쪽나무, 꼭두서니 등도 마음을 기울여 가꾸라고 하시는 분이니, 이쯤 되면 어린 두 아들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랐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이 값진 조언을 충실히 따르지는 못할 것 같고, 여태 생각 못했던 아욱 하나를 내 텃밭 종자 리스트에 올려놓는 것으로 서당에서 도망치듯 슬쩍 빠져나온다.

얼마 전 볼일이 있어 전남 강진에 갔다가 내친김에 하루를 묵으며 강진 구경을 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거처했던 동문 밖 주막을 재현한 사의재(四宜齋)에 가서 조밥에 아욱된장국을 먹었다. 다산은 두 아들뿐만 아니라 제자 황상에게 준 글에도 남새밭 지론을 펼쳤다. 여기에도 역시 아욱이 빠지지 않는다.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옛사람들이 아욱에 대해 언급한 바를 따로 적어놓을 정도이니, 그만큼 아욱을 좋아하고 즐겼던 모양이다. 스스로 농사지을 밭 한 뙈기조차 아쉬웠던 유배지에서 구수한 아욱된장국 한 그릇의 위로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자의 철학과 공부법에 새삼 감복하고 집에 돌아와 나도 아욱국을 끓였다. 아욱 손질법은 좀 유별나다. 아욱 줄기는 뚝 꺾어서 껍질을 벗겨야 한다. 잎은 바락바락 쥐어짜듯 치대며 씻는다. 푸른 물을 갈아주며 세 번쯤 반복해야 비로소 냄비에 넣을 준비가 끝난다. 그다음은 쉽다. 미리 만들어둔 다시마 멸치육수에 된장과 약간의 고추장을 풀어 끓이고, 육수가 끓으면 아욱을 넣는다. 채 썬 양파 조금, 마늘, 대파, 홍고추 등을 추가한다. 아욱국에는 주로 보리새우를 함께 넣는데, 바지락으로 대신해도 좋고 아욱만으로도 충분하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몇 번이나 아, 욱하고 치밀었을 격분도 바락바락 씻어내고 담담하게 달래줄 수 있었던 장한 푸성귀 아닌가. 그 덕목이 웬만한 고깃국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아욱국을 끓여 밥을 먹는다. 생각은 담백해야 하고, 용모는 장중해야 하며, 말은 과묵해야 하고, 동작은 무거워야 한다는 선생의 교훈을 다 따르지는 못하더라도 그의 밥상 정도는 따를 수 있다. 이 가을 몇 번 더 아욱을 바락바락 문지를 테다.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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