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돋을새김

[돋을새김] ‘오징어 게임’과 넷플릭스 파워

이영미 영상센터장


“그건 마치 남북한이 손을 잡는 거 같잖아.” “그러면 우리가 얼마나 강력해지겠어. 지대공 미사일도 우리 거, BTS도 우리 거.” “세계 정복이 코앞이네.” 싱글맘과 사는 15살 인도계 미국인 소녀 데비. 지난여름 시즌2가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네버 해브 아이 에버’의 주인공인 데비는 모의 유엔 토론에서 라이벌인 친구로부터 동맹을 제안받고 이렇게 말한다. 방탄소년단과 미사일을 다 가진 정복자 대한민국이라니. 한국 드라마에서는 허락받지 못했을 농담이다. 그러게. 둘을 합치면 한국인은 무적이 되겠는 걸.

프린스턴대가 목표인 데비는 경쟁심 만렙의 다혈질 소녀다. 일본계 혼혈 소년을 짝사랑하는 중이다. 단짝 친구인 라틴계 소녀는 로봇덕후, 중국계 친구는 드라마클럽 회장이다. 로맨스 드라마는 문화 간 위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완벽한 몸을 전시하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바비인형 같은 백인 배우의 전유물이었다. 영화 ‘클루리스’부터 ‘퀸카로 살아남는 법’, 드라마 ‘가십걸’까지 하이틴 로맨스는 백인의 장르였다. 검고 노랗고 개성 넘치는 2020년대의 주인공은 BTS와 북한 미사일을 두고 농담을 나누고, 그걸 남한의 구독자인 내가 감상한다. 백인이 백인의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듣기만 하던 그런 시대는 갔다. 전 지구를 시장으로 포괄하는 글로벌 플랫폼 넷플릭스가 열어젖힌 신세계다.

지난 추석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시작한 넷플릭스 순례가 어쩌다 보니 미국 하이틴 로맨스까지 이어졌다. 극사실주의 드라마로 호평받은 ‘D.P.’에 이어 ‘오징어 게임’까지 K드라마가 친 연타석 홈런의 여파였다. ‘오징어 게임’은 지난 24∼26일 전 세계 넷플릭스 TV쇼 부문에서 3일 연속 1위에 올랐다. 1위를 한 나라는 70개국이 넘는다. 팬덤은 경이로웠다. 틱톡 해시태그(#) 조회수는 100억회를 돌파했고 달고나, 양은도시락 같은 추억의 아이템은 세계인의 밈(meme)이 됐다. 반응 속도는 더욱 아찔했다. 영화 ‘기생충’의 성공이 몇 개월에 걸친 대장정이었다면 ‘오징어 게임’이 뜨는 데는 일주일도 안 걸렸다. 구독자 2억명을 보유한 스트리밍 플랫폼의 힘이다.

‘오징어 게임’ 성공 덕에 국내 팬도 글로벌 플랫폼의 폭발력을 실시간으로 체험했다. 더불어 넷플릭스가 얼마나 유연하고 가차 없는 운동장인지도 이해하게 됐다. 넷플릭스는 할리우드가 아니다. 결과만 보면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중심도, 권위도 없어 보인다. 전 세계에 그물처럼 퍼진 구독자 네트워크와 그들이 내는 구독료를 위해 넷플릭스는 어떤 문화적 위계도 뒤집을 준비가 돼 있다. 경기장에는 장벽도, 경계도 없다. 누구든 자신의 매력을 설득하면 복판을 점령할 수 있다. 지난 일주일 ‘오징어 게임’에서 벌어진 일이다. 달고나 세트가 힙해지고, 초록색 ‘추리닝’이 할로윈 코스튬이 되는 마법이다.

넷플릭스의 성공 뒤편에서 국내 제작자의 불안감은 커진다. 그들의 위기감은 이해가 된다. 넷플릭스는 후하게 투자하되 저작권 전체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일한다. K콘텐츠가 얼마나 성공하든 과실은 넷플릭스 몫이다. 한국의 창작자는 넷플릭스 투자 덕에 간섭과 금기, PPL(간접광고)의 족쇄에서 벗어나 리스크 없이 새 콘텐츠에 도전하는 대신 대박의 꿈을 포기한다. 이런 관계가 고착하면 한국은 자칫 하청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 넷플릭스가 양날의 검으로 불리는 이유다. 무한경쟁의 끝이 무엇인지도 모를 일이다. 더 단단한 중심과 독점이 기다릴까. 그러나 당장은 반갑다고 해야겠다. 여전히 ‘로컬’로 분류되는 문화 변방의 구독자로서 주류의 견고한 중심이 깨지는 걸 목격하게 됐다. 변화는 환영이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