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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오징어 게임’을 보고 나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황동혁 감독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화제작이 됐다. 우리나라 드라마 중 처음으로 전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1위에 올랐고, 드라마 장면이나 의상 등을 흉내 내는 밈(meme)들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지난 주말 내용이 궁금해 연속 몇 편을 시청했다.

작품은 어느 날 상금 456억원이 걸린 죽음의 행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서바이벌 게임을 벌여서 최후의 1인을 가리는 내용이다. 익숙한 설정이다. 1999년 일본 소설가 다카미 고슌의 ‘배틀로얄’이 인기를 끈 이후 데스 게임(death game) 양식은 많은 대중문화 작품에서 되풀이해 온 키치에 불과하다.

타인의 죽음을 딛고, 아니 타인을 죽음으로 몰고 귀환하라. 게임의 명령은 하나뿐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특정 공간에 고립된 채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타인을 죽이는 일을 거듭한다. 양식 자체의 규칙을 파괴하고 전복하려는 기획이 없으므로 감독은 오직 작품의 세부에만 솜씨를 부린다.

‘배틀로얄’에서는 영문 모르고 게임 장소에 불려온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내몰리듯 서로를 죽인다면, ‘오징어 게임’에서는 돈에 절박한 사연을 품은 성인들이 더 적극적 능동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모두를 무찌르고 나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감독은 각자의 사정을 그럴듯하게 지어내 온정적 공감을 일으키고, 적절한 유머를 활용해 죽음의 게임이 지닌 근원적 극단적 폭력성을 완화하는 데 힘쓴다. 애씀이 열매를 딴 듯하니, 이는 다행히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오징어 게임’을 관통하는 기본 코드는 네 가지다. 능력주의, 가족주의, 회고주의, 배금주의. 돈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사회 낙오자를 한곳에 모아 또다시 생존 게임에 몰아넣는 잔인함, 식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내던질 수 있다는 헐한 희생의식, 오징어 달고나 구슬게임 등 어릴 적 놀이들을 호출해서 추억을 자극하는 복고풍, 일확천금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물신숭배 등이 뒤얽힌 채 살아남기를 인생 제일 원리로 삼는 생존주의적 세계관을 떠받친다. 그런데 물음이 남는다. 이렇게 살아도 정말 괜찮을까?

평범한 사람이 운명의 무대로 불려 나오는 일을 소명(召命)이라 한다. 중국에선 왕이 불러서 임무를 맡기는 일이었고, 히브리에선 카라(qara), 즉 존재의 근원적 뿌리를 만나는 일이었다. 이 말에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깨달으려면 성스러운 존재의 부름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스에선 소명을 클레시스(klesis·부름)라고 했다. 클레시스를 받고 신의 목소리(vo-)를 들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직업(vocatio)이란 말이 여기서 기원했다. 그런데 이는 운 좋은 일만은 아니다. 신의 뜻은 반드시 이뤄지기에, 때로는 목숨을 내던질 정도로 죽음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명은 자주 ‘데스 게임’ 형식으로 나타난다. 구약성서의 요나는 이를 잘 보여준다.

신의 호명을 받자마자 요나는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살길을 찾아 도망친다. 그러나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난 요나는 결국 게임에서 패배해서 탈락한다. 고래 배 속에서 사흘 동안 깊은 잠을 자면서 요나는 신의 뜻을 깨닫는다. 온 세상에 펼쳐진 생존 게임에서 나 홀로 살려고 하는 자는 끝내 죽음에 삼켜진다. 요나를 통해 신은 데스 게임에서 이기려면 살려고 버둥대지 말고 게임 자체를 거부하고 바다에 뛰어들라고 말한다. 죽음에 질리지 말고 사랑과 희생의 길을 걷는 곳에 구원이 있다.

소명이란 죽음보다 강한 것, 생존보다 소중한 것이 있음을 깨닫는 일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 호명된 인물들은 데스 게임을 벗어나지 못한 채 1등 외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못하는 지옥을 무한히 연장한다. 생존에만 매몰된 한국 사회의 생생한 반영이자 통속적인, 너무나 통속적인 이 작품의 한계다. 안타까운 일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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