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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올바르지 않은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당신이 최근에 읽고 있는 소설의 등장인물 가운데 마트에서 장을 보기 위해 차를 몰고 가다가 신호를 위반한 대형 트럭과 부딪혀 사고를 당한 남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보조석에는 아들이 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아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크게 다치고 말았다. 한데 아들이 인근 병원으로 실려 오자 외과의사가 “이 애는 내 아들이라서 내 손으로 수술할 수 없다”며 치료를 거부하는 게 아닌가.

여기까지 읽었을 때 당신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혹시 어리둥절해하며 앞으로 돌아가 읽었던 대목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나. 별로 어리둥절해하지 않았다면 게이 커플을 예상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외과의사를 남자로 봤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들려주고 생각을 물었을 때 “외과의사가 엄마”라고 대답한 사람은 소수였다고 한다. 행동과학자 프라기야 아가왈은 ‘편견의 이유’에서 젠더 고정관념의 만연함(의사는 남자, 간호사는 여자)을 예로 들며, 스스로는 어떠한 편향도 없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단단한 편견에 여전히 갇혀 있음을 보여준다.

2012년 무렵 나는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에게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한국에도 제법 알려졌지만 마쓰모토는 일본 추리소설의 시작점이다.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해 히가시노 게이고, 요코야마 히데오 등이 그에게서 ‘문학적 세례’를 받아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고백했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느 순간부터는 추리라는 장르에 한정하지 않고 ‘국민 작가’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아마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드라마와 영화로 재탄생되는 원작의 방대함과 넓은 스펙트럼 때문이었으리라.

나도 그 점에 반해 번역 출간을 결심하게 됐다. 그런데 편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생겼다. 워낙 오래전에 출간된 작품이라 젠더 편향적인 표현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원작자는 이미 고인이어서 상의할 길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독자들에게는 양해를 구하며 “그 시대를 보여주는 것이므로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는 일러두기를 적고 책을 펴냈다. 하지만 예상대로 편향적 표현을 지적하는 독자 항의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일본에서는 올해 기리노 나쓰오 작가가 일본 펜클럽 회장으로 취임했다. 펜클럽이 1935년 창설된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 엔도 슈사쿠, 아사다 지로 같은 남성 작가들만 역대 회장으로 이름을 올렸고 여성 회장이 등장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하지 않으면 또 남성이 계속해 회장을 맡을 테고 자칫 일본 문학이 뒤처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맡기로 결정했다며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회를 밝혔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과거에 명작으로 불렸지만 현세대 가치관으로 볼 때 여성 차별적 표현이 담긴 작품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었다. 이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기리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러한 작품을 단죄하면 여성 차별이 없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를 덮어버리고 없던 일로 치부하는 게 되죠. 역사 수정주의로도 이어질 수 있는 흐름입니다. 차별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문제예요. 어두운 풍조는 여전히 현실로 존재하는데 소설 속에서 지워버리자는 흐름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한계로서 읽고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시대든 그 시대만의 리얼리티가 존재할 텐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며 작가의 작품에 무조건적인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했을 때 과연 어떤 결과가 도래할까. 이 문제에 대해 기리노는 자신의 가설을 소설 ‘일몰의 저편’에 형상화해 두었다. 많은 사람들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음에도,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면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절대로 쓰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작가들에게 내면화될 거라는 위기 의식이 생겼기 때문에 발언한 것이다. 정말 대단한 기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가의 소설에서 무엇을 읽어낼 것인지는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겠지만.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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