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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선거의 영성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이렇게 간단한가! “내가 주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습니다.” 다윗이 죄를 인정하자마자 하나님은 용서를 선포했다(삼하 12:13). 마치 기다리기나 했듯이…. 이렇게 쉬운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그토록 엄청난 죄를 그렇게 준엄하게 꾸짖더니 죄를 인정하는 순간 용서가 선포됐다.

우리는 어떤가. 죄를 인정하는 순간 벌떼같이 일어나 더 큰 소리로 심판을 쏟아낸다. 진짜 뉘우치는 것 맞니? 무엇을 뉘우치는지 자세히 말해볼래? 뉘우치는 증거는 뭐지? 네가 인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문서로 작성하고 서명할 수 있어? 위기를 모면하려고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진짜 뉘우친다면 이제 어떻게 책임질래? 뉘우치는 게 맞는다면 자리에서 내려와야지. 죄를 인정한다면 그렇게 살면 안 되지. 잘못했다고 말하면 다야? 너무 뻔뻔한 거 아닌가? 자기들은 무슨 의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잘못을 인정한 사람을 심판하고 아예 작살을 낸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한 보물 간직하듯 보관해 놓았다가 시시때때로 꺼내서 되새김질하고 써먹는다. 사정이 그러하니 죽을 때 죽더라도 결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죄인이 죄를 인정하기도 전에 용서부터 했다. 용서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분인 것처럼. 그는 간음한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했다. 아예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됐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희희낙락 조롱하며 비웃는 인간들을 위해 기도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용서를 바보 같은 용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용서를 배우고 싶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닮는 것인데, 그 영성의 길은 용서받고 용서하는 용서의 길이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기 전에 나를 위한 것이다. 내 안에 쌓이는 미움과 분노와 슬픔과 아픔을 몰아내려면 가능한 한 빨리 용서해야 한다. 용서할 건더기만 있으면 붙들고 늘어지면서 악착같이 용서해야 한다. 아니 건더기가 없어도 무조건 하고 보는 것이 좋다. 용서는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끌어가는 길이다. 용서는 나에게 예수님을 닮는 경지로 이끌어 가는 안내자이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나에게 잘못한 그대여. 나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소. 나의 원수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선거판이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마치 여러 개의 럭비공을 운동장에 쏟아 놓고 여러 팀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차고 던지고 잡고 빼앗고 뛰고 부딪히고 넘어지는 난장판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자기에게는 잘한 것들만 찾고, 상대에게는 잘못한 것들만 찾아내 최대한 과장하고 가능한 한 크게 떠들어 대고 있다. 그 와중에는 불분명한 것일수록 확실하게 말하고, 없는 것은 만들어 퍼뜨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마치 나의 영웅화, 상대의 비인간화를 경쟁하는 듯하다.

문득 이런 꿈을 꾼다. 가능한 한 양보하기, 서로 영웅으로 만들기, 허물은 감추어 주기, 자신의 잘못과 실패는 정직하게 고백하기, 겸손하게 자기 낮추기, 따듯하게 상대 북돋기, 많이 듣고 이해하기, 차분히 설명하고 설득하기, 다름을 존중하고 차이를 조정하기, 평화롭게 하나 되기, 서로 축하하고 섬기기…. 그리고 선출되면 아주 슬퍼하기.

주님은 우리에게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했다. 우리의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다가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거든 아주 무겁게 받아들이고 깊이 허리 굽혀 섬김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런 모습을 나는 선거의 영성이라 부르고 싶다.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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