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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가 1번지 삼청동 달구는 원로 거장들 전시 향연

미술계 저항의 기수서 주류로… 3명 개인전

한때는 저항의 기수였다. 기존 미술에 대항해 그들이 제안한 미술은 어느새 한국 미술계의 주류로 편입됐다. 그들은 이제 원로가 돼 한국 미술계의 거장으로 불린다.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원한 현역으로 작업하는 원로 3명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화랑가에서 동시에 각각 개인전을 한다. 주인공은 박서보(90) 이건용(79) 서승원(80)이다. 박서보는 1956년 당시 미술계 권력을 배출하던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반대하는 반국전 선언을 발표하며 추상 시대를 열었다. 박서보의 후배 세대인 서승원은 63년 비구상그룹 오리진을 만들며 한국 추상미술을 이끌었다. 박서보와 서승원 등이 이끈 단색화는 국제미술 시장에서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브랜드가 됐다. 이건용은 전위미술 그룹인 ST를 이끌며 신체를 이용한 행위예술을 선구적으로 선보였다. 신체적 행위의 결과물로서 드러나는 회화는 단색화의 인기를 이어가는 새 주자로 주목받고 있다.

단색화의 세계, 세상 스트레스 빨아들이는 듯
국제갤러리 박서보 개인전

박서보 작, '묘법 No. 140410', 2014, 캔버스에 한지와 복합매체, 130×200㎝. 국제갤러리 제공

초봄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미는 새싹 같은 연두, 가을 산의 불타는 듯한 단풍의 붉은색, 부끄러운 듯 화사한 진달래 같은 분홍…. 전시장에는 원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명품을 선호하는 멋쟁이 원로 작가 박서보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도 흰색 슈트에 분홍색 셔츠를 받쳐 입고 나타났다. 지팡이에 의지했지만 전시된 작품을 설명할 때는 말을 끊어야 할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작가는 "세상은 스트레스의 병동이다. 20세기의 그림은 관람자에게 공격적이었다. 21세기의 미술은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치유의 미술이 돼야 한다"며 "자연의 색채를 내 화면에 유인해서, 그 색채가 많은 사람을 치유하면 좋지 않겠나 싶어 색채를 쓰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자연은 원초적 자연뿐 아니라 인공의 재자연도 포함된다. 야간 조명이 비치는 한강 마포대교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도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단색화로 불린다. 단색화는 70년대부터 일련의 작가들 사이에 집단적으로 나타난 추상화 경향이다. 흰색 회색 등 무채색과 중성색을 주조로 했기에 단색화로 불린다.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는 점도 공통적인 특징이다. 박서보 작가의 경우 캔버스에 젯소를 바르고 연필을 반복적으로 긋는 '묘법' 시리즈로 유명하다. 70년대 초기 묘법을 선보인 이래 지속적으로 이를 변주해오고 있다. 자신의 아이가 네모 칸이 있는 공책에 연필로 뭔가를 쓰다가 잘 안 되자 마구 휘갈기는 걸 보고 착안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원색을 쓰는 색채 묘법으로 달라졌다. 연필 묘법에선 캔버스에 연필을 사용해 연필로 드로잉하듯이 선을 긋는다. 색채 묘법에선 한지를 사용하는데, 두 달 이상 충분히 불린 한지를 세 겹 캔버스 위에 붙이고 연필을 도구처럼 사용해 골을 내듯이 민다. 그러면 젖은 한지가 좌우로 밀리면서 논두렁 같은 골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물기를 말린 후 스스로 경험한 자연경관을 상징하는 색을 덧입힌다. 결과물인 색채 묘법에는 정적인 고요함과 리듬감 있는 활력이 공존하며 감상자를 어루만진다. 작가는 "스트레스를 빨아들이는 흡인지 같은 게 내 작품"이라고 말했다. 31일까지.

화면 전체 파스텔톤 부드러운 감성 선사
PKM갤러리 서승원 개인전

서승원 작, '동시성 21-211', 2021, 캔버스에 이크릴릭, 130×162㎝. PKM갤러리 제공

네모난 도형이 캔버스 안에서 조형미를 이루며 배치돼 있다. 경계선은 흐릿해져 기하학적 도형이 갖는 딱딱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분홍 주황 노랑 계열의 파스텔톤 색조가 화면 전체에 따듯함을 더한다. 색은 서로 겹쳐져 푸근함을 주곤 한다.

서승원 작가의 신작이 대거 나온 전시장에서 그가 청년 시절에 선보였던 기하학적 추상의 엄격함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60년대에 그는 오방색 중심의 기하학적 추상을 선보였다. 초기부터 지금까지 기하학과 추상을 평생의 과제처럼 고집한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


개인전 제목은 '동시성, 무한계'이다. 동시성의 의미를 묻자 그는 "형태 색채 공간, 이 세 요소가 등가를 이루며 하나의 평면 위에서 동시에 어울림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신작이 주는 따스함은 한지를 투과한 빛이 주는 부드러움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어린 시절 한옥에 살았다. 문풍지가 뱉어내는 은은한 달빛의 기억이 있다. 달빛이 창호지를 적시며 스며 나오듯 한 번 정제되고 탈색된 색을 추구한다. 그는 "이중섭이 소, 김환기가 달항아리를 갖고 한국성을 표출하려 했다면 저는 한지를 통과한 것 같은 색상을 통해 한국성을 표현하려 한다"고 말했다.

한국성은 작가 생활 초기부터 추구한 과제였다. 그는 "선배 세대가 유럽의 영향을 받은 앵포르멜(끈적끈적한 느낌의 비정형 추상)을 할 때 우리는 반기를 들고 '우리 미술을 찾자' '한국적인 것을 찾자'고 외쳤다. 저는 문 창살 문양, 책거리 그림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라고 했다. 이번 전시에선 책거리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초기의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부터 한지를 투과한 듯한 빛이 느껴지는 후기의 따뜻한 추상화까지 50여년 작품 세계의 변천을 일별할 수 있다. 9일까지.

캔버스에 그린 하트 문양, 꿈틀거리는 생동감
갤러리현대 이건용 개인전

이건용 작, ‘76-3-2021’, 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3×162.2㎝. 갤러리현대 제공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선들이 그려진 대형 캔버스를 등진 채 이건용 작가는 작업 과정을 시연했다. 그가 보여준 대로 이건용의 작품들은 정면에서 캔버스를 보고 그린 게 아니다. 캔버스를 등지거나 측면에 서서, 혹은 뒤에서 앞으로 손을 뻗어 그린다. 예를 들면 캔버스에 그려진 하트 문양은 작가가 캔버스와 90도 각도를 이루며 선 채 팔을 휘두른 결과물이다. 캔버스에는 물감 자국이 뚝뚝 묻어난다. 작가는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생색을 그대로 쓴다. 어두운색과 밝은색 두 가지를 각각 휘두르면 색이 캔버스 위에서 자연스레 서로 섞인다. 그래서 색이 활어처럼 펄떡인다. 팔에 각목을 대고 신체를 부자유스럽게 한 상태에서 작업하는 연작도 있다. 신체 드로잉으로 불리는 일련의 작업 세계는 박정희정권 시절의 정치적 억압을 상징하기 위한 회화적 제스처로 해석됐다.

작가는 76년 서울 출판문화회관에서 ‘신체의 풍경’을 처음 발표한 후 45년간 이 작업을 이어왔다. 처음에는 합판 위에 매직펜으로 드로잉을 했으나 이후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렸다.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화면 뒤에서 혹은 화면을 등지고 그린 사람은 세계 회화사에서 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방가르드 미술이 그러듯이 미술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술시장에선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 2018년 세계 유명 화랑인 페이스 갤러리 베이징점 개인전이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급반전됐다. 하트 모양을 이룬 ‘신체의 풍경 76-3’ 연작은 경매에서 1억원을 훌쩍 넘은 가격에 낙찰되며 완판 행진을 이어갔다. 이번 신작 회화 34점도 전시 시작 전에 완판됐다고 한다.

신체 드로잉의 탄생 계기는 ‘딸의 첫걸음’이었다. “막 걷기 시작한 딸이 크레용을 빨다가 뒤뚱거리면서 쓰러져 벽에 선이 그어졌는데 이후 벽에 다가가 손이 닿는 만큼 선을 그리더라고요. 말리지 않고 선을 마음껏 긋도록 했죠.”

작가는 하트 연작 12점을 격자 모양으로 전시한 벽면 앞에 서서 “내 소원이 큰 뮤지엄에 100호 하트 100점을 거는 것이다. 앤디 워홀(미국 팝아트 거장)이 보면 울고 갈 것”이라고 말했다. 워홀은 메릴린 먼로 연작이나 캠벨 수프 통조림 연작을 격자처럼 선보이는 전시방식으로 유명하다. 31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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