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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늑대와 오징어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빈 공간이 보이면 그렸다. 넓은 공터라면 좋지만, 좁은 골목길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디서 분필이라도 주워 오면 그림 그리는 게 한결 나았다. 삐뚤빼뚤해도 상관없다.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의 단순한 조합이니. 그 시절, 어느 동네에서나 흔하게 하던 오징어 놀이를 우리는 오징어 달구지라고 불렀다. 또래 다섯 명으로 이뤄진 ‘우리 편’은 인근에서 강자였다. 한두 살 많은 형들과 겨루기도 했고, 윗동네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우리 편’은 나름대로 작전을 짰다. 기본 틀은 단순하다. 마지막 1명이 세모와 동그라미의 교집합 부분에 닿을 수 있도록 나머지 4명이 단계마다 희생하는 전략이다. 몸이 잰 아이와 덩치가 큰 아이가 조를 이뤄 한발뛰기를 하며 세모의 잘록한 허리 부분에 닿는다. 둘 중 하나는 미끼로 움직인다. 다른 아이들도 이런 식으로 다리 건너기를 시도한다. 상대편 진영으로 진입해서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을 남기고 모두 육탄 방어로 승리를 향해 내닫는다.

단순한데도 이게 먹힌 비결은 사실 다른 데 있다. 우리는 딱지나 구슬 같은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눴다. 누구 하나에게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늘은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 역할이라면, 내일은 몸으로 상대를 막아서는 희생자가 돼야 한다. 비싼 옷을 입고 나왔는데 몸싸움에 찢어지면, 함께 그 아이 집으로 가서 혼이 나기도 했다.

놀이와 현실은 이란성 쌍둥이 같다. 비슷한 원리와 규칙으로 작동하는 점, 승리와 그에 따른 보상은 무수한 희생과 패배 위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대신 현실에선 승자와 희생자의 평화로운 ‘옷 바꿔 입기’나 ‘역할 교대’를 기대하기 어렵다. 결정적으로 현실은 능력주의 탈을 쓴 공정이 지배한다. 개인의 소질과 재능에 노력을 합쳐 ‘능력’으로 규정하고, 능력에 따라 사회·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분배하는 시스템은 얼핏 공정해 보인다. 하지만 능력을 가리는 잣대는 정교하지 않다. 능력을 형성하고 펼칠 기회도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현실에서 자주 목격된다. 2017년 기준으로 근로소득만 놓고 보면, 상위 30%가 전체 근로소득의 67%를 가져갔다. 여기까지는 능력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자산소득을 더하면 얘기가 무거워진다. 상위 20%가 전체 소득의 66.4%를 차지한다. 부동산 소득의 68%는 상위 10% 자산가의 손에 쥐어진다. 지난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전체 신입생 가운데 55.1%는 월 소득 상위 20%(월 949만원 이상)에 속하는 가구의 자녀들이었다.

능력주의가 품고 있는 독은 사회, 집단의 영속성을 위협한다. 인류가 혹독한 야생의 생태계에서 매일의 생존 투쟁을 압도적 승리로 장식하는 데 있어 최대 무기는 집단과 사회라는 탁월하고 단단한 ‘외피’였다. 승자 독식, 패자를 돌아보지는 않는 능력주의로는 집단과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희생과 협력을 바탕으로 하는 집단은 늑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늑대는 상당한 수준의 사회성을 지닌 동물이다. 협력해 사냥하고, 어린 새끼와 늙은 구성원에게 사냥감 나누기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새끼는 공동으로 키운다. 늑대 무리의 우두머리는 가장 강한 개체가 아니라, 가장 경험 많고 영리한 개체가 맡는다. 우두머리는 정찰, 공격 등 궂은일에 늘 앞장선다. 늑대는 무리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꺼리지 않는 습성도 보인다.

함께 오징어 놀이를 했던 ‘우리 편’의 누가 작전을 짰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아이들 머리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이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우리 편’ 가운데 한 아이는 살짝 다리를 절었고, 그 아이를 중심으로 뭉쳤던 기억이 난다.

김찬희 디지털뉴스센터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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