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청사초롱

[청사초롱] 나를 창조하게 하는 사랑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우리는 오직 다른 사람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해주는 장점들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장점은 타인의 판단을, 즉 이미지를 요구한다.”(앙드레 기고, ‘사랑의 철학’)

우리는 사회 속에 살아가면서 저마다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얻게 된다. 누군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 누군가는 용기 있는 사람, 누군가는 똑똑하거나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 같은 몇 가지 ‘규정’들이 곧 내가 된다. 그런데 무엇이 됐든 그러한 규정들은 타인들의 ‘인준’을 필요로 한다. 나 혼자서만 아무리 ‘나는 똑똑하고 용기 있다’라고 선언하더라도 그런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적어도 내가 그럴 만한 사람이라고 확인해줄 ‘증거’가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그 증거가 곧 ‘타인’이다.

사회 속에서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간다는 건 늘 그런 타인들을 내 안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다. 내가 스스로 능력 있거나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사회 속에서 그렇게 인정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도 된다. 가령 좋은 직장을 갖고 있다든지, 동료들과 관계가 좋아 칭찬을 듣는다든지, 용기 있는 투자로 무언가를 얻었다든지 하는 외적 기준들이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의 경우 이런 기준들이 급격하게 뒤틀리는 경험을 선사한다는 점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장점이나 단점, 즉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속성들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 비친 반영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내가 회사에서 아무리 용기 있는 사람이라 평가받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겁쟁이로 본다면, 나는 더 이상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사랑은 이 세상에 그 이전까지 없던 기준을 끌고 들어온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이라는 기준이다.

대개 처음 사랑을 하는 연인은 이러한 새로운 ‘기준’의 등장에 혼란을 경험한다. 지금껏 나는 부모와 친구 관계, 학교에서의 평가 기준 등에 의해 나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그런데 스무 살 언저리쯤 만난 이 ‘첫사랑’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을 완전히 바꾸기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착한 아들이었던 나는 갑자기 그녀에 의해 나쁜 남자가 되기도 한다. 친구들 사이에서 언제나 진지한 역할이었던 내가 그에게는 엉뚱하고 귀여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나에게는 그 속성이 가장 중요한 ‘나의 핵심’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에 빠져드는 일이란,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게 고정불변하는 ‘영원한’ 자아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어제까지 나는 겁쟁이였지만 누군가와 어떤 사랑을 하느냐에 따라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더 용기 있는 자로 만들어나갈 수도 있다. 나를 용기 있는 자라 보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고, 내가 그의 시선을 사랑하고, 그에 따라 정의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면,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사랑이라는 게 대개는 이미 성격이나 능력, 조건이나 성향을 모두 갖춘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소유하며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무엇도 ‘고정’된 채로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사랑이란 어떤 성격이나 조건을 갖춘 사람을 소유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그렇게 사랑이 우리 존재가 ‘유동적’이라는 본질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삶을 하나의 창조 과정으로 보게 하고, 우리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가느냐’라는 질문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 놓게 된다.

정지우 (문화평론가·변호사)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