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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티 테이블] 기억의 위로


한 사람의 기억은 곧 그 사람 자체라고 할 만큼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좋았던 기억들은 기억하면 할수록 과거가 의미 있게, 내가 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반면 실패의 기억이나 상처받은 기억은 비관주의와 패배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기억 중에 무의식의 기억과 관계가 깊은 ‘암묵기억(Implicit Memory)’이 있다. 암묵기억이란 과거의 경험이나 학습으로 뇌에 저장돼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을 말한다. 자동차 운전을 오래 했던 사람이 몇 년을 쉬었다 다시 운전대를 잡아도 운전을 잘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잊었던 아픈 기억이 외부 자극으로 불현듯 작동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기억은 ‘상처’가 되기도 ‘위로’가 되기도 한다. 기억이 상처가 아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미국의 작가 프레드릭 뷰크너는 어린 시절에 경험한 아버지의 자살이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저서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에서 치유하는 기억의 힘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기억의 방을 통해 고통의 순간들을 일부러 방문해 그때 그곳에도 어김없이 임재했던 하나님을 소환했다. 그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을 통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 안에 다른 사람의 고통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우리의 눈과 더불어 마음도 열어주는 이러한 순간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나는 그것을 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라고 불렀다. 아무도 그 은혜를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기이하고도 거룩한 은혜’ 중)

기억이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기억의 방’으로 들어가는 일은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을 걷는 듯한 위험을 알고도 시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심의 어두운 숲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란 믿음으로 기억의 방에 들어간다면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거기 바로 그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기억의 치유 과정은 숨겨진 것을 발견하도록 훈련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성령께서 치유하기를 원하는 아픈 기억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주도록 의탁하는 과정이다. 기억의 치유 단계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고백하기’ ‘치유를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기’이다. 화해를 시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사랑할 힘이 생기고 상처받은 기억이 감사로 가득 찰 때 비로소 기억이 치유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지난 시간 중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기억’하는 것이다. 현재는 비록 어려움 속에 있지만 예전에 나에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 내 삶의 고통 속에서 나를 건져 주셨던 하나님을 기억의 창고에서 불러와 새롭게 경험한다면 지금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생길 것이다. 이는 신앙적 갈등과 고난을 극복하는 커다란 힘이 된다.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내면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자리는 바로 ‘기억이라는 넓은 궁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억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되살리는 것, 기억 안에 존재하는 생각을 통해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 기억 안에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우리 삶을 회복시킨다고 했다. 그러기에 우린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가 미치는 영향력은 바꿀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이제 ‘위드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있다. 그동안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생활에 소홀한 부분은 없었는지, ‘하나님의 기억’을 잊고 살지 않았는지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영성가 잔느 귀용의 말처럼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주님께 아무것도 구하지 말고, 다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분의 뜻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십시오.”(‘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기’ 중)


이지현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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