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여의춘추-천지우

[여의춘추] 백 투 더 조선

천지우 논설위원


건설 중인 아파트 단지가 인근 왕릉의 조망을 가려서 문제가 되고 있다. 인조의 아버지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가 묻힌 김포 장릉을 둘러싼 일이다. 왕릉 가까이에 건물을 지으려면 사전에 문화재청의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해당 건설사는 그러지 않았고, 문화재청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공사에 제동을 걸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내년 입주를 앞두고 이미 꼭대기 층까지 골조 공사를 끝낸 아파트를 부숴야 하나.

건설사는 2017년 변경된 규정에 따른 사전 심의를 받지 않았지만, 2014년 문화재 현상변경 허가를 받은 택지를 매입해 짓는 것이니 다시 심의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공사 초기에라도 문화재청이 문제를 지적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이 됐다.

해당 아파트를 철거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명 넘게 동의한 것을 보니 여론은 문화재 보호 쪽이 우세한 모양이다. 하지만 왕릉 자체를 물리적으로 해치는 것도 아니고, 무덤에서 앞을 바라봤을 때 풍수지리상 중요한 산을 가린다고 거의 다 지은 아파트를 부수는 건 아무래도 합리적이지 않다. 추존왕 무덤의 조망을 보호하는 일이 입주예정자들의 피해와 막대한 비용 발생을 무릅쓸 만큼 중할 리는 없지 않은가.

왕릉의 조망권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조선이라는 과거에 대한 한국인의 애착이 강함을 느낀다. 요즘 대선판에서 ‘봉고파직’ ‘위리안치’ ‘역모’ 같은 오래된 말들과 주역의 괘가 등장하는 걸 봐도 그렇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손바닥에 그려진 왕(王)자, 윤 전 총장의 멘토를 자처하는 유튜버의 긴 머리와 흰 수염도 21세기 대한민국보다는 조선시대와 어울려 보인다. 대선 주자들의 관상이나 사주팔자가 어떻다는 얘기가 기사화되는 것 역시 전근대적인 풍경이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꺼낸 ‘봉고파직’은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과정에서 해프닝이 있었다. 지난달 29일 이 지사가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를 향해 “국민을 속인 죄를 물어 봉고파직하겠다”고 했는데 여러 매체가 이를 잘못 듣고 ‘권고사직’이라고 쓴 것이다. 봉고파직이란 말이 생소한 기자들이 많아서 그랬을 테다. 봉고파직이든 권고사직이든 보도가 많이 됐으니 이 지사는 흡족해 했을지 몰라도 그런 어휘 구사는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 발화자는 재치 있는 표현이라 생각하며 썼겠지만, 알아듣지도 못하는 젊은 기자들이 무슨 재치를 느꼈겠는가. 요즘 말로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옛날 말을 써서 사람들을 과거로 데려가려 하는지 모르겠다.

조선시대 왕이 살던 궁궐 바로 뒤에 대통령 관저가 있는 것도 마뜩치 않다. 청와대가 경복궁의 일부로 보여 왕정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구중궁궐에 들어앉아 있기만 하고 국민과 소통하려 애쓰지 않으면 민주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왕조시대의 무능한 임금으로 보인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랬다. 또 작가 홍세화씨는 지난해 ‘우리 대통령은 착한 임금님’이란 제목의 글에서 “불편한 질문, 불편한 자리를 피한다는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보다 임금님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열성 지지자들은 문 대통령을 성군(聖君)으로 떠받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5년마다 대통령이 아니라 왕을 뽑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도 “대선이 상대 진영을 초토화시킬 왕을 뽑는 선거가 돼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어릴 적 시골집에서 증조할머니와 함께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할머니는 뉴스에 나온 노태우 대통령을 보면서 “나라님 귀가 커서 좋다. 덕이 많다”고 칭찬했다. 그러고 보니 대통령의 귀는 정말 컸다. 나라님이란 표현도 기억에 남는다. 대통령을 임금으로 여긴 것인데, 조선의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1897년에 할머니가 태어났음을 감안하면 그런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후 대통령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대통령을 임금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너무나 퇴행적이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량치차오는 조선의 멸망에 관해 쓴 글에서 “조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관념이 매우 박약하다”고 야멸차게 평했다. 인식이 조선시대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저런 소리를 듣게 된다. 좀 벗어나자.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