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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남의 비극을 보는 방식

이대성 연세대 교목실장


조선 중기 유몽인이 편집한 것으로 알려진 야담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얼음이 언 한강에서 광대 부부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춤과 소리도 잘하고, 얼음판에서 미끄러져 넘어지는 연기도 익살스럽게 잘해서 수많은 군중이 둑 위에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음이 깨져 광대의 부인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광대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해 보려고 몸부림치며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얼음은 더 넓게 깨져 발을 동동 구르고 땅을 치며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군중에게 도와 달라고 목이 쉬어라 외쳤지만 군중은 그것도 연기인 것으로 생각해 더 크게 박수를 치고 깔깔 웃으며 광대 부부의 공연을 즐겼다.

남이 당하는 비극을 오락거리로 여기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지만 이야기 속 군중은 모든 게 연출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출되지 않은 실제 비극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발달한 통신 매체의 영향으로 우리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사건을 수시로 접한다. 해변가에서 발견된 난민 소년의 시신, 목숨을 건 탈출 과정에서 이륙한 비행기 바퀴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미사일과 폭탄의 굉장한 위력….

전쟁과 관련된 비극뿐 아니라 빈부격차가 심해진 불공정한 사회구조 때문에 생기는 수많은 비극도 우리가 쉽게 접하게 된다. 최근의 ‘오징어 게임’ 현상은 세계 어느 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비극적 현실에 대한 공감과 관심의 결과가 아닐까. 이런 비극들을 접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한가. 참담한 고통의 사례들을 확인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것? 왜곡된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영화를 보면서 마음속에 비분강개의 정서를 가져보는 것? 그 외에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마치 가장 비극적인 사건 베스트10을 찾는 식으로 남의 비극을 흥밋거리로 삼는 것은 아닌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3장에서 비극적 연극에 탐닉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한다. 이런 연극에서 관객은 비극을 막거나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극을 즐기기 위해 초대된다. 관객은 극 중 인물의 슬픔과 고통이 더 크고 깊을수록 그 연극에 매료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마음을 괴롭히는 감상을 좋아하며 슬픈 것만 찾아다녔고” “꾸며낸 괴상한 비극을 보면 그만큼 더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었고, 눈물을 많이 흘리게 할수록 매력이 더 있었다”고 회상한다. 왜 사람들은 눈물과 슬픔을 사랑하는 것일까. 불쌍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고 같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 자신에게 불쌍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돼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들은 극중에 나오는 고통을 자신이 당하는 것은 결코 원치 않는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비극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가가 아니고 비극을 막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가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남의 비극을 연극을 보는 방식으로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게 된다. 남이 겪는 다양한 종류의 비극을 구경하면서 슬픔을 느끼지만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찾아 다른 채널이나 사이트로 옮겨가는 것은 아닌가. 바로 문밖에 나가면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이웃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굳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모니터하며 그것을 통해 느끼는 아픔을 비장미(悲壯美)로 착각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무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강둑에 서서 광대 부부의 공연을 봤던 군중과 달리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이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계속 구경만 하는 것일까.

이대성 연세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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