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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과거를 묻지 마세요

이승우(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얼마 전부터 해 질 무렵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됐다. 어떨 때는 그 시간을 위해 하루를 보내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꽤 오래전에 생긴 습관이지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더 중요한 일과가 된 것 같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보면 뜻밖의 장소를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늘 걷던 길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여러 번 걸었는데도 보지 못하던 것을 어느 날 문득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고 고은 시인은 노래했거니와 내려갈 때 못 본 꽃을 올라가면서 보기도 하고 어제 내려가면서 보지 못한 꽃을 오늘 내려가면서 보기도 한다. 감각의 대상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하는 사람과의 상호작용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며칠 전에는 아차산 둘레길을 걷다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라는 노래비를 발견했다. 1959년 나애심이 부른 이 노래는 안현철 감독이 만든 같은 제목의 영화 주제가였다.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로 이어진다. 한 많은 자신의 과거를 묻지 말라고 호소하는 노랫말이 인상적인데, 당시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상당히 유행했다고 한다. 전쟁과 가난, 이념 대립으로 인한 갈등, 그 힘든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에게 말 못할 사연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과거를 묻지 말라는 호소가 그 시대의 지배적 문장이었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잊고 싶거나 지우고 싶은 사연을 가진 사람이 과거에 대해 질문받는 것을 좋아할 리 없다. 불행하거나 수치스러운 과거를 되새기고 싶은 사람은 없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과거를 묻지 말라는 문장이 갖는 호소력이 감소한 것도 아니다. 개인의 권리와 사생활 보호가 강조되면서 오히려 과거 불문의 주장은 더 강화된 면이 있다. 누구에게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다. 그런 과거를 누가 추궁당하고 싶겠는가. 그러니까 타인의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은 예의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물어야 하는 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은폐된 과거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은 심리 치료의 기본이다. 어떤 과거는 밀봉되는데, 밀봉될 뿐 죽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는 밀봉된 채 살아서 그 사람을 만든다. 일그러지게 하고 구부러지게 한다. 괴물로 변해 그 사람을 해치는 예도 흔하다. 그런 경우 과거는 치료를 위해 떠올라야 한다. 떠올리기 위해 물어져야 한다.

과거를 물어야 하는 영역이 또 있다. 대선 주자들의 오래전 일이 발굴되고 소환되는 작금의 대선 경선전을 보면서 그들이 ‘과거를 묻지 말라’는 호소를 얼마나 하고 싶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그 사람의 과거를 묻는다. 과거가 그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생각을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심지어 우리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고향과 조상까지 묻곤 한다. 국민의 선택을 받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정직하게 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가?’가 이 물음의 진짜 의도는 아니다. 그가 과거에 한 일이 아니라 과거에 그가 한 그 일에 대한 대답이 현재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한다. 과거에 대한 물음에 답하는 것은 지금 그가 누구인지 대답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우리는 그의 과거를 묻는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되려는 이들은 과거를 묻지 말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과거를 묻지 말라는 건 과거의 입을 막는 것이다. 과거의 입을 막으면 현재를 들을 수가 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승우(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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