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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21세기 지주와 소작농

한장희 산업부장


‘5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이 질문을 받은 몇몇은 “‘영끌’을 해서라도 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하겠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은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으니까. 한때는 부동산 광풍이 일부 투기 세력 때문이라는 주장에 공감했다. 그런데 요즘엔 구조적 문제가 원인이라는 분석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경기 부양을 위해 풀린 돈이 전 세계 자산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속도와 파장이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서울의 3.3㎡당 평균 아파트 매매값은 현 정부가 출범한 2017년 5월 2326만원에서 지난달 4652만원으로 정확히 배가 올랐다. 그 결과 서울에 아파트를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의 격차는 월급만 모아선 평생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벌어져 버렸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역설한 ‘노동소득으로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자본수익률’ 이론의 생생한 사례를 목도한 많은 국민들은 혼란과 불안을 호소한다. 열심히 일해본들 자신의 처지가 변하지 않는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여기저기서 원망과 자조가 넘쳐난다. ‘지주는 사업가·투자가, 자산이 있는 자영업자·회사원이고 소작농은 자산이 없는 자영업자와 회사원’이라는 분석 글엔 공감 댓글이 이어진다.

젊은 세대의 좌절감은 이미 위험 수위다. 지난해 20, 30대 상위 20%의 자산이 하위 20%의 35배에 달한다는 통계를 보고 우리 사회 계층구조가 20세기 이전으로 회귀했다고 강변하는 이들도 등장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는 다르다. 하지만 ‘부모 찬스’ 아니면 살 집을 구할 수 없고,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이들은 자신의 처지가 과거 소작농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느낀다. 특히 이 중 상당수는 과거처럼 ‘부의 대물림, 가난의 대물림’이 본인 세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저서 ‘상속의 역사’에 소개된 연구 결과를 보면 17~19세기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일단 소작농으로 지위가 떨어진 사람 가운데 소농이나 대농으로 상승 이동을 경험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 이들의 자녀도 마찬가지다. 결국 한번 소작농은 영원한 소작농이었던 셈이다. 현재의 자산가들도 자신들의 성을 공고히 쌓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올해 1~8월 아파트 증여 건수는 5만8298건으로 관련 통계가 집계된 2006년 이후 가장 많았다. 집값이 뛰고 대출 문턱이 크게 높아진 상황에서도 ‘21세기 지주’의 자녀들은 손쉽게 내 집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건 탈출구를 못 찾고 있는 20, 30대가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기대도 접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여당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인 정책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세 제도까지 흔들어 놓은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소작료처럼 매달 임대료를 갖다 바치지 않고 돈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게 전세였다. 하지만 정부·여당이 인심 쓰듯 제정한 ‘임대차 3법’의 역풍을 맞아 오히려 전세는 그 씨가 마를 지경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자녀가 6년 근무하고 50억원을 퇴직금으로 받아갔다는 소식은 벼랑 끝에 몰린 젊은 세대의 가슴에 비수가 돼 꽂혔다.

최근 여당의 대통령 후보는 “당선 즉시 강력한 부동산 대개혁으로 부동산 불로소득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없애겠다”고 장담했다. 말은 시원하지만 이 시대의 소작농들은 기대도, 믿지도 않는 눈치다. 오히려 그들은 두려워한다. 1997년 외환위기 사태 때 그랬듯 위기가 오고 부동산 거품이 빠지면 그 고통은 힘 없는 사람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일만 해온 우리 부모는 왜 나에게 물려줄 아파트 한 채 없냐”는 탄식이 과연 다음 정부에서는 사라질 수 있을까.

한장희 산업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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