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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사랑하며] 그립다, 제주

이원하 시인


나에겐 이런 경험이 있다.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물건을 손에 넣었는데 막상 손에 넣자마자 방구석에 두고는 쳐다보지 않던 경험. 그토록 바라고 꿈꾸던 제주도에 정착하게 됐는데 이사를 끝마치자마자 서울이 그리워진 경험. 그토록 애타고 설레던 짝사랑 상대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감정이 식어버린 경험 말이다. 참 이상하게도 소유할 땐 소홀하다가 무소유가 되면 다시금 감정이 커져서 이미 사라진 대상을 그리워하고 눈물을 흘린다.

지금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앞에 두고 제주도를 그리워한다. 제주도에서 지낼 땐 따스한 눈길로 풍경을 바라본 적 없으면서 뒤늦게 청승을 떤다. 종종 그리움을 넘어선 우울함이 찾아오기에 철저히 제주도 사진이나 영상은 피하면서 지낸다. 하지만 삶이 생각과 계획대로 흐르지 않는다. 출간을 앞둔 온통 제주도 내용뿐인 산문집의 추천사를 청탁받았다. 잠시 고민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그리움과 정면으로 돌파하며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리 전달받은 원고를 읽으며 주말을 보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과거를 곱씹거나 미래를 상상하느라 현재는 뒷전이다. 지금 부다페스트에는 금빛 단풍이 한창이다. 모든 생명체가 가을의 뽀송뽀송함을 만끽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여행객이 없어서 중단됐던 유람선은 다시 운행을 시작해 강물을 노란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이런 아름다움을 눈앞에 두고 제주도만 그리워하고 있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겨울이 지나면 부다페스트에서의 생활도 끝이다. 지금 윗집에서 공사하느라 귀를 찌르는 소음이 들리지만 이마저도 나중엔 그리워질 순간이다. 시를 쓸 수 있고, 공기가 맑고, 냉장고에 신선한 음식이 가득하다면 현재를 아끼고 사랑하련다. 현재를 즐기는 사람이 되련다. 그 현재가 손해를 보는 순간이거나, 책 모서리에 손가락이 베이는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부다페스트(헝가리)=이원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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