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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김수영에 대한 불편한 진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김수영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백석 시인과 더불어 그가 후배 시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신화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발터 베냐민의 발언처럼 신화화란 위험하기 때문이다. 유종호 비평가의 진술에 의하면 김수영이 60년대 난해시를 쓰던 시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쓴 쉬운 시편들의 성공 때문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그의 난해시편 중에는 기대 이하의 것들도 있다. 따라서 감히 말하건대 주체적 독자들은 그의 소통불능 시편들에 대해 전혀 주눅들 필요가 없다. 난해함은 미숙이지 심오함이 아니다.

한국 지식인들의 비겁한 점 중 하나는 낯선 것, 난해한 것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경외하는 태도다. 이런 이유에는 일찍이 임화가 언급한 이식문화론 탓도 있을 것이다. 김수영은 소시민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글을 무기로 불의한 시대에 맞서 혼신을 다해 싸워온, 우리 시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시인이었다. 이 점을 높이 산 이들 중 대개는 칭송하고 떠받들 줄만 알았지 글과 생활 속에서 올곧게 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실천은 유보한 채 책상에 앉아 인유하고 주석 달면서 과잉 해석을 일삼는 것이 과연 온당한 태도일까.

이용자들의 과도한 욕망 때문에 김수영 시편들은 지쳐 있고 피곤하다. 김수영이 한 시대가 낳은 탁발한 시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를 우상 숭배하는 풍조에는 선뜻 동조하기 힘들다. 그리고 내 소견으로는 그가 남긴 시편 중 서른 편 내외가 울림 큰 것으로 인정될 뿐 나머지는 적정 수준에 못 미치는 것들로 여겨진다. 그는 시보다는 산문에서 능력껏 재능을 발휘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태도와 벼린 시정신은 보통 인간의 접근을 불허할 정도로 높고 예리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시의 신(神)이라도 되는 양 추앙받아 마땅한 것일까. 그는 생전에 자신만의 독자적 세계를 창조해 왔으며 일체의 우상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하지 아니했던가. 따라서 우상화하는 것은 그의 이러한 삶과 뜻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우리에게는 부끄럽게도 오래전부터 우상을 숭배하는 집단 최면이 존재해 왔다. 이런 증세는 지식인 사회에서 더욱 심하다. 나는 김수영을 과도하게 숭배하는 현상이 불편하다.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신화화란 경계와 주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평자들은 부지불식간 김수영 시편들을 자기주장의 합리화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삼아온 것은 아닐까. 지식인들은 자기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과 분야에 대해 과도하게 열등의식을 지니는 경향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서 비롯한 지적 식민지성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새것 콤플렉스로 이어지고 극단으로 치달아 언어불통의 실험으로 결과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김수영을 시보다는 다른 이유로 좋아해 왔는데 첫째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정직했으며 자기반성에 철저했다는 점이다. 둘째 그는 자본주의 체제 하의 시인답게 돈을 중요시한 시인이었다. 당시의 누구들처럼 돈에 대해 허세를 부리거나 가면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이것은 상인 집안이었던 그의 가계사와도 연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인물이나 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을 풍문에 의존하는 경우(니체식으로 말하면 ‘노예 의식’)가 많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 일부 독자는 비굴한 면이 없지 않다. 자기 줏대나 견해가 없는 것이다. 작심하고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독자들이 시를 읽지 않고 시인을 읽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어야 한다. 초심을 잃는 순간 타락한다. 진실은 불편하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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