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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코너] 민주주의를 흔드는 괴물

전웅빈 워싱턴 특파원


신문, TV, 라디오 등 주류 언론 뉴스를 얼마나 신뢰하는가. 미국이라고 다를 건 없다. 지난주 갤럽 조사에서 신뢰도 36%가 나왔다. 1976년 조사 때 72%의 딱 절반이다. 시민이 언론을 불신하는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눈길 끄는 대목은 따로 있었다. 정치 성향별 차이다. 민주당원 68%, 공화당원 11%가 ‘신뢰한다’고 답했다. 양측 차이가 57% 포인트다.

공화당원 사이에서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이 커진 건 2016년부터다. 당시 조사에서 공화당원 14%만이 뉴스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직전 해 같은 질문에선 32%가 나왔다. 당원이 대거 물갈이된 게 아닐 테니 짐작 가능한 이유는 따로 있다. 도널드 트럼프 등장이다. 2015년 6월 대선 경선 참여 선언부터 공화당 대선 주자가 되기까지 트럼프는 극단을 자극한다. “멕시코 이민자들은 마약쟁이 강간범” 등의 혐오 발언은 주류 언론 비판을 받았지만 지지율은 거꾸로 치솟았다. 시골, 기독 보수주의, 고졸 이하 졸업자가 특히 열광했다. 평등, 정의 등을 말하는 기득권의 고상한 이상주의가 역차별을 일으키고, 미국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여기는 일부 백인들도 자극했다.

콧대 높은 주류 엘리트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삼키며 기죽어 있던 세력이 수면 위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트럼프는 멱살잡이하듯 대놓고 언론을 비난했다. 대신 트위터와 페이스북, 유튜브를 이용했다. 알고리즘을 타고 증오, 혐오, 가짜뉴스가 퍼질수록 추종자가 늘고 유대도 깊어졌다.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 언론 신뢰도가 곤두박질한 것도 이때부터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2017년 이후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의 언론 신뢰도 격차는 54~63% 포인트 벌어질 정도로 당파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

극단으로 분열된 나라에선 분노와 불신이 판쳤다. 백신을 맞으라고 통사정해도 꿈쩍 않는 6600만명이 이를 말해준다. 대신 동물용 구충제 이버멕틴이 불티나게 팔린다. 분노와 불신을 먹고 자란 괴물은 이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둥을 흔들고 있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2018년 68%에서 올해 54%로 떨어졌다. 국민 절반이 민주주의 핵심 보루인 사법부의 절차와 판단을 의심한다. 행정부에 대한 신뢰는 2000년대 초반 60%대 후반에서 최근 44%로 하락했다.

사법부 행정부에 대한 신뢰 역시 편에 따라 갈렸다. 사법부 신뢰도는 공화당원 사이에서 61%로 높다. 민주당원이나 무소속 응답자의 경우 각각 50%, 51%에 불과했다. 갤럽 조사가 시작된 후 가장 낮은 수치다. 트럼프가 재임 시절 대법관을 보수 성향으로 채운 뒤 빚어진 현상이라는 게 중론이다. 올해 백악관 주인이 트럼프에서 바이든으로 바뀌면서 행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정치성향별로 급반전했다. 민주당원 사이에서 행정부 신뢰도는 직전 해(6%)보다 81% 포인트 급등했다. 반면 공화당원 사이에선 84% 포인트가 하락해 7%로 쪼그라들었다.

나라가 이 정도 갈라지면 팩트와 진실은 판단의 주요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내 편을 향한 맹신만 강화한다. 한 트럼프 지지자는 지난해 코로나19 증상이 나타난 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진자 숫자를 늘려 진보 언론의 먹잇감이 되지 않겠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말했다.

트럼프는 지금도 가짜뉴스를 대놓고 퍼뜨리고, 인종차별과 사회적 약자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대선 패배 이후 그가 선거 결과를 부정하며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지만 추종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력으로 큰 ‘트럼피스트’는 하나의 현상이 됐다. 불신과 증오를 먹고 자란 괴물은 자신에게 양분을 제공하는 자를 보호하는 모양이다. 그 괴물이 지금 한국에도 있다.

전웅빈 워싱턴 특파원 im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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