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희망과 용기를 꽃피워내는 삶

펄 벅 기념관

펄 벅 기념관 내부에서 만난 옛 혼혈아동 시설 소사희망원의 미니어처와 펄 S 벅 여사의 글귀. 친필 사인과 함께 “힘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용기는 가슴 속의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걸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걷는다. 주말 아침 독자와 만나는 이 칼럼은 코로나19 대유행의 시기, 각자 흩어져 반나절가량을 걸으며 묵상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마련됐다. 코로나 암흑기를 거쳐 일상 회복을 위한 위드 코로나가 본격 논의되는 시기, 인류를 일시 정지시킨 팬데믹에서 하나라도 얻는 게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게 걷기 묵상의 습관이라면 더 바랄 게 없다.

오늘의 출발점은 지하철 1호선 부천역이다. 남부삼거리 광장으로 나오면 황동빛 여성과 어린이 동상이 옆자리를 비우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에 빛나는 펄 S 벅(1892~1973) 여사와 그가 돌보던 혼혈 아동의 모습이다.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이다.”

펄 벅 여사가 한국을 소재로 쓴 소설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에 나오는 문장으로 동상 뒤편에 새겨져 있다. 살아있는 갈대 머리말에서 펄 벅 여사는 “독립군 재판과 일제의 기독교회 방화사건을 비롯해 유감스럽게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날 일어난 일들까지 모두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구한말 대원군 축출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술국치와 3·1운동, 독립운동과 해방까지, 펄 벅 여사는 외국의 독자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이 소설의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먼저 얘기한다. 국권피탈 식민지배 태평양전쟁 등으로 이어진 참혹한 역사. 소설 이후의 남북 분단과 6·25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까지 생각하면 고상한 한국인들은 정말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냈다. 지금의 코로나19 따위는 사실 국난 근처에도 못 간다.

광장 건너편에서 시작하는 펄 벅 무지개길을 거쳐 성주산 초입의 펄벅기념관까지 걷는다. 펄 벅 여사는 미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선교사 자녀로 자라나 스스로 ‘정신적 혼혈아’라고 불렀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미군과 현지인 사이에 태어나 핍박받던 혼혈아와 엄마들을 돕기 위해 펄벅인터내셔널을 세웠다. 앞서 스웨덴 한림원은 1938년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여사에게 수여하며 “인종을 분리하고 있는 큰 장벽을 넘어 인류 상호 간의 일치감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을 썼고, 위대하고 생동하는 예술을 창조했다”고 평가했다. 펄벅기념관에 들어서면 여사가 세웠던 혼혈아동 시설인 소사희망원의 미니어처 위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힘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용기는 가슴 속의 의지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펄 벅 여사의 이 말을 삶으로 증명한 이가 바로 그의 딸, 줄리 헤닝이다. 경기도 파주 법원읍에서 생모와 함께 살다가 모친이 저수지에 몸을 던진 이후 펄 벅 여사의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농장 그린힐스에서 살게 된 헤닝은 최근 자신의 삶을 돌아본 한글판 자서전 ‘개천에 핀 장미’(고요아침)를 발간했다(국민일보 2021년 10월 1일자 32면 참조). 중학교 수학교사 출신으로 목회자 사모가 된 그는 희망과 용기로 무성한 장미꽃을 피워내며 이웃 성도들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


기념관을 나와 성주산 출렁다리를 찾아간다. 부천시와 시흥시를 가르는 하우고개 위에 걸쳐 있어 좌우로 양쪽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잘 정비된 산길을 따라 서울신학대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산길 한가운데 ‘진리와 성결’이란 학교 방향 표지판이 눈에 띈다. 서울신대 정문에는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Sanctify Them by the Truth)”란 요한복음 17장 17절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기독교 인류애 구현의 현장으로 남아있는 부천 지역이 새롭게 느껴진다. 소사역으로 발길을 돌리며 오늘의 걷기를 마무리한다.


부천=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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