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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후보님들, 우연의 일치는 없어요

박지훈 종교부 차장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요술봉 같은 필승법은 없겠지만 승률을 올려주는 방법은 존재한다. ‘우연의 설계’라는 책에 실린 가위바위보 전략 가운데 인상적인 내용만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①생각하되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라. ②상대가 노련하다면 가위를 내라. ③전략이 모두 실패하면 보를 활용하라.

①~③번 가운데 눈여겨봄 직한 전략은 ②번과 ③번이다. 이들 전략이 등장한 이유는 사람들이 바위를 좋아해서다. 바위를 내는 경우가 많으니 보를 활용하면 이길 확률이 높아지고(③번), 이런 사실을 아는 가위바위보 베테랑은 보를 낼 테니 가위로 상대하는 게 좋다(②번). 바위 선호 경향은 각종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1998년 일본의 한 수학자가 725명에게 가위바위보를 시켰더니 35%가 바위를 냈다. 페이스북에선 한때 ‘로샴불’이라는 가위바위보 게임이 유행했는데 가위바위보 1000만회를 조사했더니 바위 비율이 36%나 됐다. 세계가위바위보협회(World RPS Society) 관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바위 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가위바위보를 단순히 확률의 게임이라 주장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아요.”

오직 우연만이 승패를 가를 것 같은 가위바위보에도 이렇듯 미묘한 내재율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고 여기는 대부분 일들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1997년 한 자동차 경주에선 선수 3명의 랩 타임이 정확히 1분21.072초를 기록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기막힌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다. 하지만 정상급 선수들 경주에서 일등과 꼴등의 기록 차이는 0.1초 내외다. 랩 타임을 1000분의 1초 단위로 쪼갰을 때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00가지이며 3명의 랩 타임이 같을 확률은 1만분의 1이다. 낮은 확률이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참고로 1만분의 1은 골프에서 홀인원이 나올 확률과 비슷하다).

이렇듯 세상사엔 있을 수 없는 우연의 일치라며 놀라 자빠질 만한 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일어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해 배후에 어떤 의도나 법칙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경우는 ‘보렐의 법칙’을 설명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다. 프랑스 수학자 에밀 보렐이 만든 이 법칙은 확률이 아주 낮은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칙이 적용된 예로는 원숭이가 아무렇게나 타자기를 두드렸을 때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나올 수 있느냐는 식의 우스개를 꼽을 수 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책은 보렐의 법칙을 설명하면서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아주 낮은 확률’을 100만분의 1로 규정해 놓았다.

보렐의 법칙을 떠올릴 정도가 아니라면 우연의 일치라고 떠들어대는 일들은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순도 100%의 우연이라고 하기엔 의외의 높은 확률이 존재하거나, 미심쩍게 여겨지는 구석이 많거나, 뒤숭숭한 음모가 도사린 일들이 많아서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요즘 정치권에선 대선 주자들을 둘러싼 추문이 간단없이 이어지고 있다. 대선 주자들은 온갖 의혹을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며 눙치며 넘어가곤 한다. 우연을 의심하며 실체를 심문하는 기자에겐 기레기라는 멸칭이 따라붙는다.

생각해 보면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조종간을 잡은 비결도 온갖 우연을 의심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덤불을 보면서도 그 뒤에 맹수가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했고, 그런 조심성이 지금의 인류를 만들었다. 브레히트의 ‘의심을 찬양함’이라는 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박지훈 종교부 차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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