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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 생계형 좌파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어떤 인물이나 집단을 생계형으로 묘사할 때는 속뜻을 잘 살펴야 한다. 생계형 범죄에 대한 대통령 특별사면이나 생계형 소상공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에 토를 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반면 생계형 정치인이나 생계형 학자라는 표현에는 지사형 정치인이나 선비형 학자는 못 된다는 빈정거림이 섞여 있다. 유사한 또 하나의 용례가 생계형 좌파다. 약자와 함께하는 봉사형 양심적 좌파도 아니고 고학력의 이념형 강남 좌파도 아닌 한마디로 족보도 없이 자기 생계만 챙기는 좌파라는 뜻이리라.

한 언론인이 이재명 경기지사가 더불어민주당의 20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자 당의 주도권이 생계형 좌파로 넘어가 민주당 수명이 다해간다고 평할 때도 이런 유형의 정치인을 얕잡아보는 속내가 드러난다. 한동안 586정치와 강남 좌파의 내로남불이 공격의 표적이었다면 이제는 좌파의 이념 부재와 족보 없음이 새 타깃이 된 셈이다. 그러나 자기 생계와 동떨어진 이념과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위선에 빠지기 쉬운지는 이미 확인됐다. 차라리 생계형 좌파가 자기 생계에서 출발해 남의 생계 특히 약자의 생계를 정치 활동의 중심에 놓고 구체적 성과를 내도록 독려해야 진짜 좌파가 많아지지 않을까 싶다.

어떤 눈으로 보더라도 이 후보 선출은 좀 이례적이긴 하다. 변변한 운동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치 커리어 면에서도 국회의원이나 장관, 당 대표와 같은 그럴듯한 스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경기 성남에서 시민운동을 할 때도 국가 정책을 다투는 전국 단위 투쟁이 아니라 지역에 뿌리박고 몸으로 부딪히며 성과를 내는 변방의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그가 정치적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철저하게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정치 의제로 만들어 성과를 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런 유형의 정치인을 20대 대선 후보로 끌어올렸다는 것은 당의 진보 개혁성을 더욱 강화해 달라는 요구라고 볼 수 있다. 민주당은 그동안 민주화와 남북 화해, 호남 지역을 묶는 정치 연합이었을 뿐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지지 세력을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시민사회단체와 연대 활동을 벌였지만 그들의 생계 문제를 정치 중심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이번 대선이 당의 진보적 정체성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민주당이 진보의 정체성을 강화할 최적의 시간은 작년 상반기 정부가 한국판 뉴딜을 구상할 때였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취약계층의 삶이 더욱 어려워지고 디지털 전환과 기후위기에 대한 국가적 대응이 긴박한 시기에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판 뉴딜을 제시했다. 그러나 간판만 화려할 뿐 메뉴는 160조원에 달하는 종합 산업투자계획으로 채웠다. 1930년대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에서 이름만 따왔을 뿐 뉴딜을 통해 어떻게 국가를 리셋하고 미국 민주당은 이 과정에서 정치 구도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극심한 불평등과 경제 대전환 위기 앞에서도 민주화 경력을 따지고 친일 족보를 들먹이는 정치로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생계 위협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저소득 불안정 고용 계층과 부동산 정책 실패의 직격탄을 맞은 청년들을 위해 대담한 뉴딜을 성사시킬 수 있어야 그들이 꿈꾸는 4기 민주 정부의 가능성도 열릴 수 있다. 이를 위해 이 후보의 여러 공약도 당 차원에서 더욱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 경선이 진행 중인 국민의힘도 똑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산업화와 분단 극복, 영남 중심의 정치 동맹이었지만 이제 그 정체성만으로는 국민의 적극적 지지를 끌어내기 어렵다. 당면한 불평등과 저성장, 디지털 전환에 따른 일자리 위기와 사회 갈등에 대한 보수적 해법을 들고나와야 한다. 구체적 처방도 없이 여야가 내가 하면 잘할 수 있다고만 주장하게 되면 선거는 사생결단 진영 대결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제 민주화와 산업화는 자랑스러운 성과일 뿐 대립하는 가치일 수 없고 지역감정 때문에 목청이 커지는 일도 없다. 여야가 타협을 모르고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근본 이유도 민생과 동떨어진 세력 대결만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야 모두 여러 계층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정치로 나아가야 할 때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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