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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관치금융이 만든 약탈적 규제

이성규 경제부장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은 금융 선진국과 후진국 가리지 않고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이에 대한 명백한 정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상환 능력이 없는 금융소비자에게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연체이자를 물리거나 주택 등 자산을 빼앗아 가는 금융사들의 영업 방식을 말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단이 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한 원인도 저축은행들의 약탈적 대출이 꼽힌다.

현재 한국의 가계대출 시장엔 약탈적 대출이 아닌 ‘약탈적 규제’가 존재한다. 금융 당국의 경직된 규제 강화로 건전한 대출 수요자들의 피해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국은 각 은행에 가계부채 증가율을 연 6% 이내로 맞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후폭풍에 주택 실수요자들은 난데없는 ‘대출 절벽’에 부딪혔다.

수십년 아껴둔 청약통장으로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은 마지막 잔금대출을 앞두고 갑자기 은행 대출이 거절됐다.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갖고 있던 집을 팔고 원하는 지역의 집을 사서 이사를 가고 싶은 실거주 목적의 1주택자 역시 피해를 보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투기 지역과 투기과열지구 내에서 6개월 이내에 기존 주택을 매도하지 못하면 담보대출이 강제 회수된다는 말에 전월세를 알아봐야 했다.

친절하게 돈을 빌려준 뒤 갑자기 야비하게 담보물을 뺏어가는 약탈적 대출 방식처럼 당국의 가계대출 총량 규제는 ‘훅’ 들어왔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4월 가계부채 관리 방안을 발표하면서 “올해 가계부채는 정부의 적극적 대응으로 증가세가 다소 완화됐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지난 8월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취임하면서부터 가계부채는 갑자기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리스크로 대두됐다.

당국은 오락가락 규제로 시장에 혼란을 부추겼다. 금융위는 이달 초 전세대출의 규제 강화 필요성을 언급했고, 실제 대출 현장에선 오른 전세금 대출을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례가 발생했다. 이에 전세대출 수요자가 대부분 무주택 임차인으로 피해가 우려된다는 비판이 거세졌다.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은 “서민 실수요자 대상 전세대출과 잔금대출이 일선 은행 지점 등에서 차질 없이 공급되도록 금융 당국은 세심하게 관리하라”고 주문했고, 대통령 말 한마디에 당국은 입장을 180도 바꿨다. 정책 신뢰도는 찾아볼 수 없다.

가계부채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3년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돌파할 당시에도 당국은 ‘가계부채 구조개선 촉진 방안’을 내고 단기간 해결이 어려운 문제이니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금 당국이 금과옥조처럼 말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도입 역시 2017년 가계부채 관리 방안에서 강조됐던 사안이다. 당국은 지난 10년간 가계부채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중장기적 해법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가계부채가 1800조원을 넘어선 지금까지 당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땜질식 처방만 하고 있다.

당국이 내놓은 이번 가계부채 해법 역시 연말을 앞두고 가계부채 증가율을 6% 이내로 묶으라는 엄포뿐이다. 만약 당국이 가계부채 총량 규제를 하려면 늦어도 지난 4월 대책에 포함시켜야 했다. 지금처럼 당국 수장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시장과 괴리된 규제를 내놓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돈 없는 서민들에게 돌아가는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2003년 카드 대란 사태 당시 관치 논란이 일자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 논란이 됐다. 이 말이 맞는다 쳐도 다스리려면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 지금은 문제가 생기면 금융 고위 관료가 은행장들을 불러 모아 호통을 치면 해결되는 쌍팔년도 시대가 아니다.

이성규 경제부장 zhibag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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