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시가 있는 휴일] 토종닭 먹으러 가서 토종닭은 먹지 않고


오라버니
맷돌 앞에서 갑자기 그러시는 게
어딨어요
시대의 고민에 답하는 인생을 살아
외로웠어요
제 꿈이 바위였잖아요
바위처럼 살자 해놓고
삭발과 점거를 일삼아놓고
산을 타넘을 땐 빨치산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놓고
술에 취하면 때렸죠 여자를
오라버니도 만만히 여겼죠 그때는
그때부터 저는 마음의 아궁이에
군불 지필 새도 없이
밤낮 정신이라는 밭을 맸어요
녹두가 뚝뚝 져서 발가락이 자꾸
외로 휘었습니다
종자가 굵고 털이 많아 해방세상이
가까웠습니다
오라버니가 취중 난동으로 감옥에
가놓고
옛일을 그윽하게 회고할 때
경이랑 영이랑 숙이랑 저랑 영롱했어요 웃었어요
그것도 승리라면 승리지요
이제 경도 영도 숙도 잘 만나지 못하고
저는 오라버니를 때때로 역겹게 생각해요
오라버니 교수 됐단 소릴 듣고
제가 얼마나 맛있게 부추에
오릴 싸먹었게요. (후략)

-김현 시집 '다 먹을 때쯤 영원의 머리가 든 매운탕이 나온다' 중

문단 내 성폭력을 고발했던 김현 시인. 운동권 남자 선배들에게 피해를 당했으나 말도 못 했던 여성 후배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대신 서늘하게 비웃어 준다.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